인간의 정신을 완벽하게 스캐닝(scanning)하여 사이버스페이스에 저장할 수 있다면 거기에 인권을 부여할 수 있을까?
올해 3회째를 맞는 ‘과학기술창작문예 공모전’에 당선된 배지훈(33) 씨가 중편소설 ‘유니크’에서 던진 물음이다. 이 작품은 중편소설 부문에 출품된 43편 가운데 본심에 오른 4편의 치열한 경합 끝에 당선작으로 결정됐다.
단편소설 부문에서는 화성으로 이사하는 한 가족의 이야기를 그린 장호진(31) 씨의 ‘은하수를 건너가는 이삿집을 위한 그림 이야기’가, 논픽션 부문에서는 어머니 배 속 아기의 쌕쌕거리는 숨소리에서 ‘G선상의 아리아’까지 소리에 담긴 과학을 담담한 필체로 풀어낸 박경호(19) 씨의 ‘소리의 변천’이 당선작으로 선정됐다.
아동문학 부문은 유물이 돼 버린 100년 전 인공강우장치를 통해 마을 사람들이 단합을 이룬다는 내용을 담은 이유연(36) 씨의 ‘동이마을 비내리제’가, 시나리오 시놉시스 부문은 인간복제와 순간이동을 소재로 사랑의 의미를 새롭게 풀어낸 이도영(27·본명 손원평) 씨의 ‘순간을 믿어요’가 당선작으로 뽑혔다. 지난해 당선작이 없었던 만화부문에서는 기생생물이 대를 이어 인간의 몸에 침투하는 상황을 뛰어난 연출 기법으로 그려낸 송태욱(32) 씨의 ‘나의 할아버지는 움베르토 에코를 닮았다’가 당선됐다.
‘과학기술창작문예 공모전’은 해마다 완성도 높은 작품들을 선보이며 과학문예 작가들의 등용문이 되고 있다. 제1회 공모전 중편부문 수상자 김보영 씨는 최근 SF 중단편 소설집 ‘멀리 가는 이야기’를 펴내며 과학소설 작가의 길을 걷고 있다.
영화 ‘장화, 홍련’ ‘달콤한 인생’의 김지운 감독은 박성환 씨의 1회 대회 단편부문 수상작 ‘레디메이드 보살’을 ‘천상의 피조물’이란 제목의 영화로 제작하여 2007년 초 개봉할 예정이다.
이번 공모전에는 6개 부문에 걸쳐 총 266편의 작품이 출품됐다. 공동심사위원장을 맡은 소설가 복거일, 윤후명 씨는 “과학 지식과 이론들을 충실히 따르는 과정에서 과학문예의 흥미로운 주제와 이야기가 나온다”고 밝혔다.
시상식은 ‘세계 과학의 날’인 11월 10일 서울 강남구 삼성동 그랜드인터컨티넨탈호텔에서 열릴 예정으로, 당선자는 중편 1500만 원, 단편 700만 원, 아동문학, 논픽션, 만화, 시나리오 시놉시스 각각 500만 원의 상금과 트로피를 받게 된다. 수상작은 인터넷(stl.dongascience.com)에서 볼 수 있다.
안형준 동아사이언스 기자 butnow@donga.com
○배지훈 중편소설 당선자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지구라는 이름의 구체 표면에 빽빽하게 도미노가 늘어서 있다고 치자. 도미노는 처음 한 개의 영향으로 쓰러지기 시작하고 걷잡을 수 없이 형체가 무너지며 새로운 패턴이 나타난다. 그러한 패턴에 관심을 두는 문학 장르가 SF라고 생각한다. SF 안에는 무한대에 가까운 도미노 배열이 존재한다. 나는 그 패턴들을 찾는 느릿한 여행을 막 시작했다. 언젠가 아름다운 패턴을 찾을 때까지 계속되는 그런 여행 말이다. 모 통신망의 창작코너에 처음 글을 써서 올린 때가 생각난다. 지금 생각하면 웃음밖에 나지 않는 초등학교 작문 수준의 글을 조목조목 비판해줬던 분께 감사드린다.
○장호진 단편소설 당선자
먼 미래의 낯선 풍경 속에서, 분명히 현생 인류와는 다른 종류의 인간들이 하고 있는 생각과 말들을 현재의 언어로 ‘번역’해 내는 것이 SF라고 생각한다. 글을 쓰면서 번역이 힘들었던 말도 있었고, 번역하기에 무리가 있는 단락들은 아예 누락하기도 했다. 낯설고 새로운 것이었던 대상이 친근하게 느껴질 때쯤, 익숙했던 것들은 다시 저 멀리 낯설고 새로운 것들의 영역으로 사라져 갈 때가 있다. 그 너머를 가만히 응시하고 있으면 드문드문 이해되지 않던 이야기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살아나 움직인다. 이것은 아마도 글쓴이는 줄 수 없는, 이야기 속의 인물들이 선사하는 것일지 모를 독자를 위한 최고의 선물이 아닐까?
○박경호 논픽션 당선자
내 글이 다른 사람에게 객관적으로 인정을 받는다는 것은 역시 기분 좋은 일이다. 어쩌면 상금이 아니라 당선 소식을 처음 접한 순간의 ‘쾌락’을 위해 글을 썼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음악을 사랑하고 물리를 사랑한다.
여러 음의 조합을 통해 아름다운 소리를 창출하는 음악, 그리고 가장 객관적으로 이 세상의 규칙을 찾아내는 물리. 아무런 연관성이 없을 듯 보이는 두 분야는 자세히 보면 서로를 포용하고 변화시킨다. 이번 당선이 ‘나의 변천’에 또 다른 패러다임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나는 아직 ‘나’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 단지 변화하고 있음을 슬그머니 느끼고 있을 뿐이다.
○이유연 아동문학 당선자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일상적인 삶의 모습은 계속 바뀌겠지만 사람들 마음속에 생겨나는 감정들은 앞으로도 그다지 변할 것 같지 않다. 과학기술이 사랑, 미움, 공포, 외로움, 탐욕, 분노 같은 갖가지 감정을 지혜롭게 해결하는 방식을 제시하고, 그것을 사람들이 사용하기로 결정한다면 얼마나 멋있을까?
동화를 쓰면서 ‘비내리제’ 유적지의 인공강우장치를 구상하는 것이 가장 힘들었는데, 글을 마치고 나니 실제로 과학자가 된 듯 뿌듯했다. 어린 독자들이 내 동화 속에서 자신의 믿음과 소망을 연구물에 담아내는 과학자의 다부진 모습을 발견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송태욱 만화 당선자
흔히 과학만화라고 하면 우주여행이나 안드로이드를 먼저 떠올리는 것이 보통이지만, 오래전부터 생각해왔던 가족이나 아버지라는 소재를 그리고 싶었다. 그러나 이야기가 머릿속을 맴돌기만 할 뿐 쉽게 정리되지 않아 답답했다. 과학만화라는 장르가 다소 부담스러웠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상상력의 범위를 넓히고 나니 오히려 과학이 아닌 것이 없었다. ‘유전’이라는 과학의 틀 속에서 이야기를 풀기로 하고 8월의 무더위가 시작된 날부터 그리기 시작해 더위가 물러갈 즈음 작품을 완성했다. 이번 공모전을 계기로 이야기를 완성하고 상까지 받게 돼 무척 기쁘다.
○이도영 시나리오 시놉시스 당선자
이 이야기를 구상한 것은 몇 달 전의 일이지만 정작 글을 쓰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수상하게 되어 한없이 기쁘지만 부끄럽고 어딘가 죄스러운 마음이 드는 게 사실이다. 충분한 자료조사 없이 너무 급하고 거칠게 이야기를 조합해낸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 때문이다. 나는 한 번도 한국영화에서 SF장르의 가능성을 상상해본 적 없었다. 하지만 ‘인간’이라는 것, 인간의 마음과 심리, 그리고 인간 존재 자체에 초점을 둔다면 SF장르도 우리 영화의 토양 위에 새롭게 뿌리내릴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부끄럽지만 이 글도 결국 조금 더 나은 이야기를 쓰게 될 미래에 저당 잡힌 것이다.
◇심사위원 명단
▽소설(중·단편) △본심: 복거일(소설가), 윤후명(소설가) △예심: 이한음(SF 작가), 고장원(SF 평론가), 박상준(SF 평론가)
▽아동문학=김이구(문학평론가), 안미란(아동문학가)
▽논픽션=이용수(과학독서아카데미 회장)
▽만화=박인하(청강문화산업대 교수)
▽시나리오 시놉시스=임재철(시네마테크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