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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에서/권순활]일본의 개혁, 한국의 개혁

입력 | 2006-06-03 03:00:00


일본 대학생들은 요즘 행복한 고민에 빠져 있다. 웬만한 대학의 4학년이면 보통 두 개 정도의 기업에서 ‘러브 콜’을 받는다. 서너 개가 넘는 회사에 합격해 선택에 고심하는 학생도 적지 않다. 도쿄의 지인(知人)은 “일할 생각이 있는데 일자리가 없어 빈둥거리는 청년 실업은 찾기 어렵다”고 전했다.

취업이 잘되는 이유는 간단하다. 투자와 소비 회복에 힘입어 일본 경제가 살아났기 때문이다. 사상 최고라는 기업 실적 발표가 잇따른다. 올해 기업 설비투자 증가율(계획 기준)은 14.5%로 19년 만의 최고치다. 2002년 2월부터 4년 4개월째 이어진 호황은 제2차 세계대전 후 최장(最長) 기록 경신을 눈앞에 두고 있다.

‘잃어버린 10년’이 피크였던 1990년대 후반을 현지에서 지켜본 필자로선 격세지감을 느낀다. 쌓인 먼지를 떨어가며 빛바랜 기사 스크랩을 찾아봤다. ‘전후(戰後) 최악의 불황’ ‘실업자 300만 육박-무너진 경제신화’ ‘세수(稅收) 격감-재정적자 비상’ ‘엔화-주가 동반 폭락’ ‘대학생 최악의 취업한파’ ‘일본 유권자, 경제 실정(失政)에 등 돌려’라는 제목들이 당시의 긴박한 분위기를 떠오르게 한다.

무엇이 몇 년 사이에 일본 경제를 이렇게 180도 변화시켰을까.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자랑하는 제조업의 튼튼한 기반이 물론 있었다. 여기에 2001년 4월 출범해 5년 이상 장수(長壽)하면서 경제를 살린 고이즈미 준이치로 정권의 내정(內政) 개혁이 가세했다.

그의 아시아 외교는 낙제점이다. 한국과 중국의 국민감정을 정면으로 무시하는 야스쿠니신사 참배에선 역사 인식의 빈곤을 절감한다. 그러나 경제 및 공공개혁 성과는 말 그대로 눈부시다.

고이즈미 개혁의 핵심은 ‘관(官)에서 민(民)으로’ ‘큰 정부에서 작은 정부로’ ‘민간기업의 활력 촉진’이다. 이를 위해 방만한 공공부문 민영화와 기업 규제 완화, 공무원 조직 축소에 나섰다. 얼마 전까지 경제단체연합회장이었던 오쿠다 히로시 도요타자동차 회장을 수시로 만나 조언을 구했다. 총리에게 건의할 내용이 있는 각료가 오쿠다 회장에게 “잘 말해 달라”고 부탁할 정도였다고 한다. ‘주식회사 일본’의 부활을 위한 정부와 재계의 협력은 경제를 둘러싼 불안 해소에 크게 기여했다.

개혁을 입에 담기론 지금 한국의 집권세력이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았다. 단어는 같지만 방향은 전혀 달랐다. 큰 정부와 대기업 옥죄기, 편 가르기와 희생양 찾기 같은 것이 키워드였다. 아 참! 세상살이에서 필요한 최소한의 예의와 금도조차 무시하는 정권 안팎 홍위병 집단의 ‘싸가지 없는 언행’도 빼놓을 수 없는 특징이지.

이런 시대역행적 개혁 타령이 의미 있는 산출로 이어질 순 없다. 경제 활력 위축과 민생의 피폐, 젊은 백수 급증과 공공부문 비대화, 나랏빚과 세금 급증만 불러왔다. 이번 지방선거 결과는 ‘불임(不妊)의 개혁’ 구호에 대한 국민적 분노와 환멸의 수위를 보여 준다.

개혁은 꼭 필요하다. 하지만 그 깃발 아래 국민의 현실과 미래를 더 고단하고 팍팍하게 한다면 그건 개악과 퇴행이지, 개혁이나 진보가 아니다. 요즘 한일(韓日) 두 나라의 풍경은 개혁의 방향과 내용이 국운(國運)의 명암을 결정한다는 점을 일깨워 준다.

권순활 경제부 차장 shkw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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