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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할리우드 ‘이웃’에 눈을 돌리다

입력 | 2006-04-06 03:00:00

최근 미국 영화는 ‘미국인의 관점에서 미국인의 이야기를 그리는’ 기존 관점을 벗어나 타인과 소수자에 대한 애정을 담아내고 있다. 사진은 아프리카에서 인권운동을 벌이다 살해된 아내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음모와 비리를 파헤치는 남편의 모습을 담은 영화 ‘콘스탄트 가드너’. 사진 제공 스폰지


《미국 사람들이 인종과 언어가 다른 이국인들을 인정하기 시작한 걸까.

정치 이야기가 아니라 영화 이야기다.

올해 각각 아카데미 작품상과 남우조연상을 수상한 화제작 ‘크래쉬’와 ‘시리아나’, 여우조연상 수상작인 ‘콘스탄트 가드너’가 잇따라 선보인다. 세 영화 모두 미국인의 관점에서 미국인의 이야기를 그려 온 기존 할리우드의 정형을 깨고 타인과 소수자에 대한 애정을 담았다는 점에서 같다.

9·11테러 이후 미국 사회에 파고든 균열과 틈을 메우는 길은 분노나 적대가 아니라 화해와 인정이라는 것을 영화를 통해 말한다는 점에서 시사적이다.》

● 교통사고 현장에서 본 인종충돌의 단면

‘크래쉬’

▽크래쉬(Crash)=로스앤젤레스라는 도시에 살고 있다는 점만 빼면, 똑같은 점이 하나도 없는 다양한 커플을 등장시켜 미국 사회가 앓고 있는 인종 편견의 내상(內傷)을 아프도록 휘젓는 영화다. 삭막하고 차가운 도시인들이 유일하게 뜨겁게 소통하는 공간은 다름 아닌 차량 충돌(크래쉬)의 현장. 백인 정치인과 중산층 주부, 백인 경찰관, 흑인 형사와 라틴계 여형사, 흑인 청년과 백인 부부, 이란인 부녀와 히스패닉 등 피부색도 나이도 다른 15명의 주인공은 교통사고를 계기로 우연한 시간, 우연한 장소에서 부딪치고 얽힌다.

이들은 겉은 멀쩡하지만, 속은 상처투성이다. 병든 아버지를 간호하는 백인 경찰은 옛날 흑인들에게 자비로웠던 아버지가 받고 있는 사회적 냉대가 일자리를 빼앗은 흑인들 때문이라는 생각에 흑인 피의자들을 폭력적으로 대한다.

영어를 못하는 이란인 중년 남자는 이란과 이라크를 혼동하는 사람들에게 ‘남의 나라 빌딩에 비행기 처박고 사람을 개 잡듯 죽이는 것들’이라고 무시당한다. 배우지 못하고 가난한 흑인 청년들은 자기네 인생이 안 풀리는 게 무조건 인종차별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정치적 야심에 목마른 남편으로부터 소외되어 있는 백인 여자는 끊임없이 누군가를 의심하고 소리치고 스스로를 상처 입히지만 왜 자신이 이런 상태에 놓여 있는지 모른다. 사람들은 모두 화가 나 있다. 가졌으면 가진 대로 불안하고 없으면 없는 대로 불만이다. 소외, 편견, 집착, 두려움, 공포, 몰이해가 낳은 외로움 때문이다. 영화 첫 부분 흑인 형사의 독백은 영화를 관통하는 메시지다.

‘정이 그리워 이러는(교통사고) 거야. 다른 도시에선 길에서 사람들과 부대끼며 정이 드는데 LA는 삭막하잖아. 늘 차 안에 갇혀 살고 사람의 체취가 그리워…(그래서) 서로 충돌하고 상처 주고 그러는 거야.’

사람들이 죽음 직전의 사고 현장에서, 몸을 가눌 수 없는 고통의 극한에서, 아픔의 밑바닥에 이르러서 ‘당신과 친밀하고 싶고 소통하고 싶고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싶었음’을 보여 주는 대목이 감동적이다. 6일 개봉. 15세 이상 관람가.

● 이주노동자 통해 이슬람 문화 조명

‘시리아나’

▽시리아나(Syriana)=석유를 두고 미국이 벌이는 정치적 음모가 기본 얼개지만 한물간 미 중앙정보국(CIA) 요원(조지 클루니), 에너지 전문 애널리스트(맷 데이먼), 인수합병 변호사와 함께 파키스탄에서 온 이주노동자 4명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미국 사회에서 이슬람의 존재를 적이 아닌 이해해야 할 대상으로 그린 영화다.

영화 속 미국인들은 천연가스 채굴권을 다시 따내기 위해 왕위 계승자를 죽이라는 임무를 받고, 개혁 성향을 가진 왕위 계승자의 경제참모로, 인수합병을 처리하는 변호사로 각각 이슬람과 인연을 맺는다. 모두 조국을 위해 일하지만, 조국은 정작 그들을 배신한다. 자발적 폭탄테러에 참여하는 파키스탄 이주노동자 와심의 내면도 객관적으로 그려진다.

영화는 자의든 타의든 이슬람 문화와 얽힌 미국인과 이슬람 사람들의 운명을 ‘석유’라는 코드로 교직하면서 미국인들이 9·11테러 이후 자신의 삶 안으로 파고든 이슬람을 이해하고 인정하기 위해 애쓰는 일면을 보여 준다. 상영 중. 15세 이상 관람가.

● 서구문명과 아프리카의 희생 고발

▽콘스탄트 가드너(Constant Gardener)=아프리카 케냐를 배경으로 인권운동을 하다 죽은 아내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거대 제약회사의 음모와 비리를 파헤치는 한 남자의 투쟁과 순애보를 그렸다.

언뜻 줄거리와 상관없어 보이는 제목은 남자 주인공 저스틴(랠프 파인스)의 취미. 적극적이고 열정적인 인권운동가 테사(레이철 와이즈)와 사랑에 빠져 결혼한 저스틴은 케냐 주재 영국대사관으로 발령받아 곧 태어날 아이를 기다리며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그러나 임신 중인 테사가 사막 한가운데서 살해되면서 그의 운명은 비극을 향한다. 테사는 케냐 빈민들을 대상으로 미국 거대 제약회사의 불법적인 신약 실험을 파헤치고 있었다. 선진 시민으로서 개발도상국을 대상화한 시선이 아니라 아프리카인의 관점으로 아프리카를 그렸다는 점이 신선하다. 원색으로 가득한 케냐의 빈민촌과 광활한 야생 그대로의 자연이 녹아든 스크린에는 감독이 보내는 아프리카에 대한 애정이 녹아 있다. 영화 끝부분 저스틴 장례식에 참석한 테사 사촌의 말은 함축적이다.

“아프리카에 살인은 없습니다. 가슴 아픈 죽음만 있을 뿐. 우린 그 죽음 위에서 문명의 혜택을 누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쉽게 얻을 수 있는 것들은 저들의 생명이 헐값에 팔린 덕분입니다.” 20일 개봉. 15세 이상 관람가.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