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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국제마라톤을 보고]그들의 고결한 도전에 눈시울이…

입력 | 2006-03-13 04:31:00


한겨울을 넘긴 홍매화 가지에 콩알 만한 붉은 꽃망울이 다닥다닥하다. 저 어린부처들이 곧 활짝 피어나겠구나 했는데, 매운 꽃샘추위가 몰려온다. 오늘 중부지방 기온이 영하 5도라 한다. 한파주의보와 강풍주의보가 내려졌다. 바람이 세서 체감온도는 더욱 낮다. 아, 마라톤엔 악조건이다. 한파주의보와 강풍주의보가 내려진 오늘, 서울 세종로엔 새벽부터 몰려든 마스터스 참가자들이 구름인파를 이뤘다. 2만4000명이다. 국내 마라톤 동호인이 5만 명이라는데, 그 반이 오늘 서울국제마라톤에 참여한 것이다.

사람들은 왜 뛰는 것일까? 도시인들에게 상습화된 건강염려증 때문만은 아니다. 달리기는 기쁨이다. 인류의 본능이다. 존재의 위엄을 빛내는 자존의 몸짓이다. 새는 하늘 위를 날고, 달팽이는 풀잎에서 기며, 인류는 땅 위를 달린다. 수렵시대에는 빨리 달리기가 경쟁력의 우위에 설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을 것이다. 경주인은 수렵시대의 신지식인이요, CEO다.

8시 정각, 출발신호가 떨어진다. 선수들이 대오(隊伍)를 이루며 뛰쳐나간다. 초원을 질주하던 수렵인의 후예들이다. 준족이다. 견각의 무리들이다. 10km가 지나자 무리에서 떨어져 나온 10여 명이 선두권을 이룬다.

거트 타이스와 윌리엄 킵상이 우승을 다툴 거라고 예측한다. 내심 지영준이 두 선수를 따라붙으며 역주하기를 기대한다.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지영준이 선두권에서 사라진다. 15km 지점에서 선두권이 다시 10명 이내로 좁혀진다.

일류 선수들은 에너지 소모를 최소화할 수 있는 동작의 최소주의를 실현한다. 동작의 최소주의 절제의 미학을 보여 준다. 한동안 선두권을 형성한 선수들의 다리만을 응시한다. 한 발이 공중으로 솟구치면 남은 한 발이 지축을 디딘다. 다시 지축을 디딘 발이 공중으로 솟고 공중에 떠 있던 발은 지축으로 하강한다. 발은 번갈아 가며 공중에 솟았다가 하강하며 땅거죽의 거대한 북을 울린다. 저 준족들은 땅의 북을 울려 소리를 내는 타악의 북채다. 쿵, 쿵, 쿵…소리가 산조로 퍼진다. 환청이다. 산조는 중모리에서 중중모리로, 다시 자진모리로 휘몰아친다.

이후 레이스는 남아공의 거트 타이스와 한 무리의 케냐 선수들이 압박을 하며 선두 경합을 벌이는 형식이다. 그것도 잠시. 거트 타이스가 선두권을 떨치고 질주하며 끝까지 독주한다.

취재 차량에 몸을 싣고 결승점인 잠실운동장으로 달려간다. 기계의 속도에 편승해 몸을 이동하는 내가 갑자기 부끄러워진다. 예상대로 거트 타이스가 추위와 바람을 뚫고 역주한 끝에 결승 테이프를 끊는다. 거트 타이스는 담요를 깐 바닥에 드러눕는다. 도핑테스트 요원이 달려와 서류에 사인을 요구하지만 거트 타이스는 볼펜을 쥘 수도 없다. 완전히 기진한 모습이다.

케냐의 제이슨 음보테가 두 번째로 모습을 드러낸다. 윌리엄 킵상은 어디로 가버린 것일까? 예상 밖으로 선전한 음보테는 결승점을 통과하며 펄쩍펄쩍 뛴다. 완주의 기쁨이 온몸으로 출렁거린다. 아! 지영준이다! 레이스 초반에 후미로 밀려난 지영준이 4위로 들어온다. 운동장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환호를 한다. 한국의 차세대 폴 터갓, 지영준의 후반 역주는 부활을 알리는 신호다! 곧 이어 여자선수인 중국의 저우춘슈가 위풍당당하게 들어선다. 놀라워라, 이 악조건 속에서 2시간 19분대라니! 국내 여자레이스 최고 기록을 깨는 대기록이다.

마라톤은 단순한 운동이다. 단순하기 때문에 원시성에 가까워진다. 그렇다고 아무나 마라톤을 할 수는 없다. 마라톤은 몸의 임계점을 통과하는 운동이다. 심장이 파열하는 듯한 고통을 이겨내야 한다. 철저하고 세심한 사전 준비가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죽음에 이를 수도 있다. 비굴한 자, 안락에 길들여진 자, 게으른 자, 이기적인 자는 마라톤을 할 수 없다. 몸을 완벽하게 영혼의 통제에 둔 자만이 경주에 참가할 수 있다. 제 몸을 통제하는 자의 영혼은 고결하다. 마라톤을 하는 사람들은 고결하다. 맑은 물길을 품은 청계천변을 달리는 마스터스 선수들을 바라보며 나는 잠깐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달리는 인생은 아름답다! 오, 브라보, 브라보, 마이 라이프!

장석주 시인·문학평론가 kafkaj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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