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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재기자의 무비홀릭]장진영 ‘표정의 스펙터클’

입력 | 2006-01-05 03:05:00


《여류비행사 박경원의 파란만장한 인생을 담은 ‘청연’은 창공을 운명처럼 가르는 복엽기의 스펙터클이 압도적인 영화다. ‘청연’에는 비행기가 그리는 변화무쌍한 곡선을 능가하는 역동적인 스펙터클이 또 하나 있는데, 바로 주인공 박경원 역을 맡은 배우 장진영의 표정이다. 단 몇 개의 표정만으로도 인물의 미묘한 감정선을 대번에 잡아내는 경제적인 표정 미학을 갖고 있는 장진영. 그녀가 ‘청연’에서 보여 주는 ‘표정의 스펙터클’을 분석한다.》

#1 무표정

무표정의 ‘메뉴’가 다양하다. 통통한 볼과 왕방울만 한 눈을 활용하는 장진영은 최소한의 얼굴 근육을 움직여 ‘풍부한 무표정’을 만든다. ‘청연’에서는 5개의 무표정이 도드라진다. 상심하거나①, 결의를 다지거나②, 희망을 품거나③, 상념에 빠졌거나④, 체념과 슬픔에 지배되었을 때⑤ 각기 다른 무표정이 나타난다.

#2 파노라마 표정

장진영은 0.2초 간격으로 미세하면서도 급격하게 표정에 낙차(落差)를 두는 방식을 통해 심정의 변화를 마치 파노라마 사진처럼 전시한다. ‘눈→입술→미간’의 순서로 슬픔을 올려 태우는 표정 짓기를 구사하는 것. 사랑하는 남자의 유해를 안고 비행 대장정에 오르는 표정이 대표적. 체념한 듯 무표정이었다가⑥, 감춰뒀던 슬픔이 눈가에 번지더니⑦, 순식간에 입과 미간으로 슬픔이 본격 확산되는 모습⑧을 관찰할 수 있다.

또 희생된 동료 대신 비행대회에 나가 우승한 직후 나타내는 표정은 시소를 타듯 상반된 감정을 오가며 수위를 조절하는 ‘움직이는 표정’의 진수를 보여 준다. 동료를 잃은 슬픔에 우승의 기쁨이 억눌렸다가⑨, 승리의 감격이 북받쳐 올라 잠시 기쁨과 슬픔이 힘의 균형을 이룬⑩ 뒤, 이내 강력한 슬픔에 의해 기쁨이 사그라지는 모습⑪으로 복귀한다.

#3 표정의 핵폭발

고공 한계치를 뚫고 비행기가 솟구치는 순간 뿜어져 나오는 장진영의 표정은 ‘청연’이 보여 주는 최고의 스펙터클. 이때 그녀는 울분과 회한의 에너지를 극한까지 응축시켰다⑫가 입을 벌리며 일제히 핵폭발시키는 방식⑬을 통해 관객을 엑스터시 상황으로 몰고 간다.

#4 무균질 표정

장진영은 여느 여배우들이 구사하기 힘들거나 구사하기를 꺼리는 표정을 결행함으로써 자신만의 영역을 지혜롭게 구축한다. 그녀는 예쁘게 보이기보다는 선머슴 같은 보이시한 표정을 짓는다. 화가 났거나⑭, 약간 쑥스러워 하거나⑮, 고통을 이겨 내는 과정에서 찡그린 표정○16을 통해 집중적으로 드러나는 만화 같은 표정이 그것. 이런 종류의 표정은 실용성을 강조하는 듯한 짧은 파마머리, 유난히 큰 눈과 흰 눈자위, 도톰한 입술, 아이 같이 동그란 얼굴형과 작은 턱에 힘입어 ‘내숭이 없고 털털하면서도 순진한’ 고유의 이미지를 만들어 낸다. 이는 장진영에게 ‘안티’팬이 별로 없는 이유 중 하나.

특히 따스한 듯하면서도 사심 없이 상대를 바라보는 모습○17은 보는 남녀 모두의 마음을 사로잡는 장진영의 대표적인 ‘무균질’ 표정. ‘내숭 표정’의 극단을 구사하면서 남성들에겐 뜨거운 사랑을, 여성들에겐 차가운 힐난을 받는 손예진의 표정(○18·‘작업의 정석’)과는 대척점에 서 있다.

이승재 기자 sjd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