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발이 흩날리는 도시샤대 교정에서 정지용 기념사업회 관계자들이 기념사진을 찍었다. 왼쪽이 사진 및 글을 보내 온 오양호 교수.
《‘향수’의 시인 정지용(1902∼1950)의 시비가 모교인 일본 교토 도시샤(同志社)대에 세워졌다. 18일 열린 시비 제막식에 참석한 오양호(정지용기념사업회장) 인천대 교수의 글을 싣는다.》
18일 오전 일본 교토 도시샤대 교정에는 굵은 눈발이 휘날렸다. 폭 160cm, 높이 100cm, 두께 35cm의 충북 옥천산 흰색 화강암에 시 ‘압천(鴨川)’을 새긴 정지용 시비는 10여 년 전 만들어진 윤동주 시비와 10m가량의 간격을 두고 세워졌다.
제막식에는 도시샤대 하타 에이지(八田 英二) 학장과 이제혁 오사카 영사 등 한일 양국 인사들과 서울에서 간 정 시인의 딸, 손자 등 100여 명이 모였다.
한국문학사에 샛별처럼 빛나는 두 시인의 시비가 일본 대학 교정에 세워진 것은 의미 깊은 일이다. 일제강점기 엘리트 한국 청년들 중에는 국립대학인 교토대나 도쿄대 대신 자유주의와 국제주의를 표방한 명문사립대인 도시샤대로 유학을 떠난 경우가 많았고 두 시인도 그들 중 일부였다.
정지용은 1923년 이 대학 영문학과에 입학해 1929년 졸업하고 귀국했지만 이후 월북했고 윤동주는 1942년 문학부에 입학해 재학 중이던 이듬해 7월 14일 사상범으로 체포되어 1945년 2월 16일 옥사하고 만다.
제막식을 마친 뒤 다들 정지용의 시의 무대가 된 압천, 즉 가모가와 강으로 나갔다. 눈 내린 강가에 서니 시공을 뛰어넘어 그의 혼백과 대화를 나누는 듯 감개가 무량했다. 정지용은 시 ‘압천’에서 임을 애타게 찾았다.
압천 십릿벌에 해는 저물어 저물어……
날이 날마다 님 보내기 목이 자젖다. 여울물 소리.
그가 날마다 이별한 임은 누구였을까. 한용운의 임, 김소월의 임, 이상화의 임이 조국이었고 애인이었는데 정지용의 임은 누구였을까. 실개천 흐르는 고향에 두고 온 사철 발 벗은 아내였을까. 짚 베개 돋아 고이시는 늙으신 아버지였을까. 아니면 저만치 떠나버린 조국을 님이라 불렀을까.
도시샤대가 두 시인을 ‘학교의 자랑’이라며 시비 건립을 허락한 것은 가슴에 남는 일이다. 이제는 정지용이 우울하게 읊조리던 ‘오랑주 껍질 씹는 나그네의 시름’을 잊어버릴 수 있는 좋은 세월이 된 것일까.
오양호 인천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