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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과 내일/심규선]한일 우정의 해, 우정은 쌓였는가

입력 | 2005-12-15 03:10:00


출퇴근길, 찬 바람에 흔들리는 그 현수막이 눈에 들어올 때마다 안쓰럽다. 때를 잘못 만난 것 같아서다. 서울 종로구 운니동의 일본대사관 공보문화원 외벽에 걸려 있는 대형 현수막엔 이렇게 쓰여 있다. ‘일한 우정의 해 2005. 나가자 미래로, 다같이 세계로.’ 해가 저무는 요즘에는 더욱 공허하다.

어깨동무를 해 보자는 시도는 좋았다. 그러나 주한 일본대사의 ‘독도는 일본 땅’ 발언으로 양국 관계는 2월부터 흔들렸다. 그리고 엊그제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의 동남아국가연합(ASEAN·아세안)+3(한중일) 정상회의에서 노무현 대통령은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를 일부러 따돌렸고, 고이즈미 총리는 이를 비난하면서 사실상 ‘우정의 해’를 마감했다. 2003년 6월 ‘한일 우정의 해’를 약속한 것도 바로 두 사람이다. 그동안 대한해협에 숱한 격랑이 일었지만 올해는 아주 특별한 해로 기억될 것 같다. 잔칫상을 앞에 놓고 대차게 싸운 것도 그렇지만, ‘독도’ ‘역사교과서’ ‘야스쿠니신사’라는 삼각파도가 한꺼번에 몰려온 것도 처음이다. 한국이 싫은 내색을 하면 미안한 척이라도 하던 일본 정부가 아예 얼굴을 돌려버린 것도 큰 변화다.

그러나 얼음장에도 숨구멍은 있고, 그 밑으론 물도 흐른다. 문화교류가 중단되지 않은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두 나라의 문화교류 현장은 정치판보다는 훨씬 성숙돼 있다.

2일 예술의 전당 토월극장에서는 일본의 창작오페라 ‘유즈루(夕鶴)’의 개막공연이 있었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문제가 생겼다. 한국 오케스트라의 한 단원이 찻길에 막혀 제시간에 오질 못했다. 빠져서는 안 되는 연주자였다. 한국 측 관계자는 몸이 달았다. 그러나 일본 측 관계자의 입에서 서툴지만 한국말이 나왔다. “괜찮아요.” 관객들도 차분히 기다려 줬다. 공연은 25분 늦게 시작됐지만 성공리에 끝났다. ‘유즈루’처럼 올해 ‘한일 우정의 해를 기념하여’ 한국과 일본에서 열린 문화행사만 700여 건이나 된다. 대단한 양적 팽창이다.

문화교류가 중요한 것은 이해타산이 없고 인적교류를 동반하는 데다 감정의 앙금을 줄이는 데 어떤 수단보다도 유효하기 때문이다. 1965년 한일 수교 이후 40년밖에 안된 시점에서 시대를 구분하는 것은 무리다. 그러나 대체로 10년마다 두 나라 사이의 최대 이슈는 정치(수교반대 데모, 김대중 납치 사건, 문세광의 육영수 여사 저격 사건) 경제(경제 협력, 기술 이전, 무역역조) 사회(역사교과서 파동) 문화 순으로 바뀌어 왔다. 문화는 스포츠와 청소년, 지자체 교류까지를 포괄한다. 월드컵 공동개최와 일본 대중문화 개방, 한류붐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

잘나가는 ‘용사마’가 잘못한 일도 없이 정치의 눈치를 살펴야 한다면, 불행이고 퇴행이다. 파국을 막으려면 먼저 일본이 바뀌어야 한다. 우정을 팽개치고, 미래에 눈을 감고, 세계를 속여 가면서까지 반짝 영광을 누렸던 과거로 돌아가겠다는 미몽에서 깨어나야 한다. 독불장군은 세계는 고사하고, 아시아의 맹주도 힘들다.

한국도 꼭 필요한 정치교류는 하고, 그렇지 않은 것은 미루겠다는 정치 중심의 방어적인 ‘투 트랙’ 전략은 수정해야 한다. 아직도 정치의 영향을 받는 분야가 너무 많다. 비정치적 분야는 자연스럽게 교류가 이뤄지도록 적극적인 ‘멀티 트랙’ 전략을 쓰는 게 좋다. 그게 국익에 부합한다. 두 나라는 싫어도 이사를 갈 수 없고, 함께 할 일도 많다.

‘유즈루’를 공연한 토월극장은 토월회(土月會)에서 따온 이름이다. 토월회는 1920년대 초 도쿄 유학생들이 조직한 신극운동단체다. 현실(土)에 발을 딛고, 이상(月)을 추구하겠다는 뜻을 담고 있다. 80여 년 전의 지혜가 오늘날의 한일 관계에도 필요하다.

심규선 편집국 부국장 kssh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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