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사반세기 동안 국내에서 독자들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베스트셀러 저자는 이해인 수녀인 것으로 조사됐다. 이어 법정 스님과 소설가 이문열 양귀자의 순으로 베스트셀러 목록에 많이 올랐다. 그리고 최근 10년간은 시집이 베스트셀러 목록에 거의 오르지 못한 것으로 나타났다. 본보와 한국출판연구소는 교보문고가 집계한 1981년부터 올해까지 25년간의 연간 베스트셀러 목록을 분석했다. 이번 조사는 25년간 매년 20위권 베스트셀러 목록에 오른 책 500권(중복 포함)의 저자와 특징을 분석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이해인과 바스콘셀루스가 국내와 해외 저자 1위=시인인 이해인 수녀의 책들은 25년 동안에 모두 11차례나 연간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랐다.
이어 법정 스님이 9차례, 이문열이 8차례, 양귀자가 7차례, 시인 류시화, 소설가 이외수가 6차례 올랐다. 류시화의 경우 외국 시의 편역 선집들이 포함됐지만, 잘 알려지지 않은 외국 시들을 ‘채집’하는 과정에 그의 개성이 짙게 스민 점을 고려해 저자로 취급했다.
이해인 수녀는 1984년 ‘오늘은 내가 반달로 떠도’를 베스트셀러 목록에 처음 올린 것을 시작으로 1985년에는 이를 포함해 3권의 시집을, 1986년에는 수필집 ‘두레박’까지 모두 4권의 책을 올렸다.
법정 스님은 1983년 ‘산방한담’을 시작으로 ‘버리고 떠나기’ ‘무소유’ ‘오두막 편지’를 올렸다. 이 중 ‘무소유’는 1996∼2000년 5년 동안 목록에 올라 최장 기록을 세웠다.
외국인 저자 가운데는 브라질 작가 주제 마우루 데 바스콘셀루스가 5차례나 목록에 올라 1위였다. 그의 소설 ‘나의 라임오렌지나무’는 1985∼1988년 4년 동안 목록에 올랐으며 소설 ‘광란자’도 1987년 목록에 올랐다.
2위는 1994년 베스트셀러 목록에 처음 고개를 내민 프랑스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로 모두 4차례 목록에 올랐다.
▽시의 시대는 저물고 실용의 시대로=백원근(白源根) 한국출판연구소 책임연구원은 “25년간 매년 20위 안에 소설이 평균 7종 정도, 수필을 포함한 논픽션이 평균 6종 정도 올라 소설과 논픽션은 큰 변화가 없다”며 “하지만 시집의 경우 부침이 심했다”고 분석했다.
1984∼1995년 이해인 김초혜 서정윤 도종환 최영미 이정하 원태연 김기린 박렬 김기만 신진호 미국 시인 예반과 레바논 시인 칼릴 지브란에 이르기까지 본격 문학과 대중 시를 가리지 않고 매년 시집 베스트셀러가 줄지어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1996년 이후 시집은 사실상 베스트셀러 목록에서 사라져 버렸다. 이정하의 ‘한 사람을 사랑했네’(2000년)를 제외하면 류시화만이 외국시 편역선과 자작시로 시집 베스트셀러의 명맥을 간신히 이어 왔다.
한기호(韓淇皓)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은 “1990년대 중반 이후 외환위기와 인터넷의 확산으로 사람들이 시를 즐길 여유와 감성을 잃어 가고 점점 더 속도에 몰입하는 사회 분위기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고 말했다. 또한 시인들이 시집으로 묶어내기 전에 문예지 등에 발표한 시들이 각 인터넷 사이트와 개인 블로그에 애송시 형식으로 소개되고 ‘퍼 나르는’ 경향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인문서의 경우 매년 평균 2권씩, 1991년에는 5권까지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랐는데 2003년부터는 1권도 오르지 못했다.
시와 인문서가 가라앉은 대신 실용서들이 급부상했다. 1993년 이명복의 ‘체질을 알면 건강이 보인다’와 이경훈의 ‘프로비즈니스 삼성맨’이 각각 웰빙과 경제경영서로서는 처음 목록에 오른 것을 시작으로 13년간 매년 평균 4.7권의 실용서가 올랐다. 특히 지난해에는 실용서가 9권이나 베스트셀러에 올라 최다를 기록했다. 이 같은 경향 역시 ‘개인의 생존’이 화두가 된 화이트칼라 독자층의 관심사를 반영하는 것이다. 번역서의 경우 달러 대비 환율이 높았던 1998∼1999년 잠시 가라앉았다가 세계화의 흐름을 반영하듯 2000년 이후 급격히 성장해 매년 평균 10종에 이르고 있다.
권기태 기자 kkt@donga.com
▼베스트셀러 제조기 ‘북 히어로’ 안나타나▼
이번 조사에서 뚜렷하게 드러난 현상 중 하나는 최근 10년간 국내 저자들 가운데 새로운 ‘북 히어로(book hero)’가 등장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북 히어로’는 독서가에 지배력을 발휘하는 베스트셀러를 잇달아 내놓는 영향력 있는 저자를 가리키는 출판계 용어다.
외국인 저자의 경우 25년간 3차례 이상 베스트셀러 리스트에 오른 이는 모두 13명(작고한 저자 포함)이었다. 이 가운데 최근 10년 내 처음 리스트에 진입한 작가는 무라카미 하루키, 조앤 롤링(해리 포터 시리즈), 스펜서 존슨(‘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 등), 파울루 코엘류(‘연금술사’ 등) 등 4명이다.
한국인의 경우 25년간 3차례 이상 베스트셀러 리스트에 이름을 올린 저자는 모두 18명이지만 이 중 최근 10년 사이에 베스트셀러 작가 대열에 합류한 신진 저자는 한 명도 없었다.
이 같은 현상은 이른바 ‘쿨(Cool) 세대’의 분위기와 맞물리는 것으로 분석된다. 1997년 외환위기 후 우리 사회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쿨 세대는 좌파든 우파든 전통적인 이념이나 가치관에 대해 냉소적이며, 정치적으로 무관심하다. 인터넷에 친숙하며 감성적인 측면도 있다. 20대에서 30대 초반까지 걸쳐 있지만, 이들 문화의 분위기는 사회 전반에 퍼져 있다.
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은 “1990년대 중반 새 저자 군(群)으로 떠오를 만한 필자는 과거 책을 통해 민족주의 민주주의 여성주의의 세례를 받은 이들이었다. 그러나 이들이 개인주의가 극대화된 쿨 세대에 맞는 지성과 감성, 상상력을 제공하기엔 역부족이었다. ‘북 히어로’를 주로 만들어 냈던 문학 분야에서 특히 그러했다”고 지적했다.
한 소장은 또 “쿨 세대는 새로운 ‘스타 필자’를 이전 세대처럼 책에서 찾으려는 경향이 적어졌다”며 “대신 젊은 세대는 인터넷에서 댓글을 붙이면서 ‘인스턴트 영웅 필자’를 만들려고 한다”고 말했다. 인터넷의 특성상 누리꾼은 마음이 바뀌면 곧장 새 필자를 찾게 된다는 것.
백원근 한국출판연구소 책임연구원은 “젊은 세대는 컴퓨터 통신 휴대전화 영화 비디오에 많은 돈을 쓰다 보니 도서 구입 비중이 상대적으로 줄어든 점이 있다”고 말했다.
문학평론가 장은수(張銀洙) 씨는 이렇게 말했다. “과거처럼 인생의 스승으로서 글을 쓰는 보편적인 지식인 저자의 시대는 저물었다. 그 대신 교양과 지식의 다양화 대중화 시대에 걸맞은 참신한 소재를 들고 나온 새로운 저자 군이 서서히 태동하고 있는 상황이다.”
권기태 기자 kk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