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정부 시절 국가정보원이 당시 민주당 권노갑 최고위원의 퇴진운동을 벌이던 당내 소장파 의원들을 도청했다는 사실이 확인됨에 따라 정치권에 충격파가 몰아치고 있다.
한나라당은 즉각 “여당도 도청한 마당이니 야당 의원에 대해서는 얼마나 더 심하게 했겠느냐”며 DJ 정부의 도청에 대한 전면 수사를 촉구하는 등 여권을 압박하고 나섰다.
그동안 “조직적 도청은 아니었을 것”이라며 DJ 측을 옹호했던 여권과 청와대는 당혹해 하면서 대책에 부심하고 있다. 김만수(金晩洙) 청와대 대변인은 9일 “현재로서는 어떤 말도 할 수 없는 상황”이라며 “검찰 수사를 지켜보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고 밝혔다.
김은성 전 국정원 국내담당 차장이 도청 대상이었다고 진술한 ‘민주당 소장파’에 속하던 정동영(鄭東泳) 통일부 장관, 천정배(千正培) 법무부 장관, 신기남(辛基南) 의원 등 열린우리당의 실세 그룹과 당내 개혁파 등은 새로운 상황에 어떤 입장을 취할지 고민하는 듯하다. 이들은 그동안 “DJ 정부 도청 주장은 한나라당의 정치 공세에 불과하다”고 말해 왔기 때문이다.
열린우리당의 유력 대권 주자인 정 장관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며 믿기지도 않는 일”이라며 극도로 말을 아꼈다. 신 의원도 “(정풍운동) 당시 숨기거나 두려워할 일을 하지 않았다. 수사 결과를 지켜보자”고 했고 천 장관 측은 “정확한 내용을 보고받지 못했다”고 했다.
당시 동교동계 이선 후퇴 요구 등 정풍운동에 적극 참여했던 열린우리당 이호웅(李浩雄) 의원은 “심증만 있던 DJ 때의 도청이 물증으로 드러난 만큼 이제 모든 것을 밝혀야 한다”고 전면적인 진상 공개를 요구했다.
정풍운동의 또 다른 축이었던 ‘새벽21’을 주도했던 장성민(張誠珉) 전 의원은 “당시 국정원이 집과 의원회관 사무실 모든 곳을 도청한다는 얘기를 수차례 들었고 직접 경고도 받았다”고 주장했다. 그는 “김 전 차장은 서울 서초구 양재동 서울교육문화회관에 별도의 사무실을 차리고 국정원의 국내 정치 사찰을 총괄적으로 보고받고 진두지휘했다”고 밝혔다.
‘새벽21’ 대변인 격이었던 김성호(金成鎬) 전 의원은 “국정원이 무차별적으로 도청을 했다는 사실은 매우 충격적”이라고 말했다.
하태원 기자 taewon_ha@donga.com
장강명 기자 tesomio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