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일 김대중 정권 시절 국가정보원 차장을 지낸 김은성 씨가 검찰에 전격 체포됐다. 연합뉴스
김대중(金大中) 정부 시절 국가정보원의 도청이 정권 차원에서 조직적으로 이뤄진 것으로 점차 드러나고 있다.
과거 김영삼(金泳三) 정부 시절 국가안전기획부의 도청과는 질적 양적으로 차이가 있다고 주장해 온 DJ 정부와 현 정부, 국정원의 주장도 설득력을 잃어 가고 있다.
▽“광범위하고 조직적인 도청”=DJ 정부 시절 도청은 과거 안기부 시절에 비해 시도나 횟수는 적었을지 모르지만 감청 장비의 과학화로 인해 한층 더 손쉽고 광범위하게 이뤄졌던 것으로 보인다.
도청에 동원된 장비는 주로 유선중계통신망을 이용한 감청 장비(R2)였다. 국정원은 1996년 R2와 이동식 휴대전화 감청장비(CAS)를 자체 개발했다고 밝힌 바 있다.
국정원 직원들에 대한 검찰 수사 결과 국정원은 전화국의 유선 중계 구간에서 회선을 따내 국정원 내에 설치된 R2를 통해 감청담당 부서인 8국에서 휴대전화와 유선전화 사이의 통화는 거의 무차별적으로 감청을 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 과정에서 주요 정치인과 경제인 언론인 등의 특정 휴대전화와 유선전화 간 통화도 실시간으로 ‘감청’했다는 게 국정원 전현직 직원들의 검찰 진술이다.
이 같은 방식으로 이뤄진 ‘감청’이 하루 평균 10건 이상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러나 감청을 위해 필요한 법원의 영장이나 대통령 승인은 거의 받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R2나 CAS를 이용한 휴대전화 감청은 대부분 불법으로 이뤄졌다는 것.
8국 내에는 R2를 이용한 감청팀과 별도로 유선전화만 감청하는 팀까지 운영됐던 것으로 드러났다.
이는 당초 국정원이 8월 5일 자체 조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김대중 정부 시절 일부 직원들의 불법 감청(도청)이 있었다”는 주장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오히려 광범위한 ‘불법 감청’이 이뤄지는 과정에서 합법적인 감청이 ‘끼워넣기’로 이뤄졌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정권 핵심에도 보고됐나=국정원 감청 담당부서 전현직 직원들은 검찰 조사에서 당시 감청 실태와 이후의 보고 과정 등을 상세하게 진술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들의 진술을 종합하면 당시 ‘감청’ 정보는 ‘통신첩보보고서’라는 이름으로 국정원장에게까지 보고됐다.
감청담당 부서인 8국 내 ‘수집팀’에서 생산된 감청 정보는 매일 아침 이 보고서 형식으로 차장과 원장에게 보고됐다는 것. 국정원장에게 도청 정보가 보고된 점으로 미뤄 곧바로 정권 수뇌부에도 보고됐을 가능성이 크다. 특히 당시 국정원장들은 매주 한 차례씩 대통령과 독대해 보고했다.
다만 당시 국정원장들이나 정권 수뇌부가 이 같은 ‘정보보고’가 ‘불법 감청’의 산물이라는 사실을 알았는지는 아직 확인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최경환(崔敬煥) 비서관은 6일 김은성(金銀星) 전 국정원 국내담당 차장이 체포된 직후 일부 언론에 “당시 정권이 특정한 목적을 위해 도청을 한 적은 없다고 믿는다”며 “김 전 대통령은 불법적인 내용을 전혀 보고받은 적이 없다”고 밝혔다.
▼김은성 前차장은▼
호남 출신의 김은성 전 국정원 국내담당 차장은 1971년 중앙정보부에 공채로 입사해 30년 넘게 국정원에 근무하면서 주로 ‘변방’으로 떠돌았다.
대전지부장, 정보학교 교수 등을 하던 그는 DJ 정부 들어 요직인 대공정책실장에 이어 국내담당 2차장에 임명되는 등 승승장구했다.
당시 국정원 주변에선 김 차장이 정권 실세를 등에 업고 있다는 얘기가 많이 나돌았다.
그러나 그는 2001년 이후 각종 ‘게이트’가 터질 때마다 이름이 오르내렸다. 그해 12월 이른바 ‘진승현 게이트’ 당시 김 전 차장은 진 씨에게서 구명 로비 명목으로 5000만 원을 받은 혐의로 구속됐고 불명예 퇴직했다.
조용우 기자 woogij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