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을 만하면 드라마 등 대중매체를 통해 재조명되는 역사 속의 인물 중 한 명이 김두한(金斗漢) 전 의원이다. ‘장군의 아들’에다 ‘조선의 주먹’이었던 그의 생애 후반부를 장식한 가장 화끈한 이벤트는 1966년 9월 22일 그가 국회에서 저지른 ‘오물 투척’ 사건이었다.
사건은 삼성그룹의 한국비료주식회사가 건설 자재를 가장해 사카린을 밀수한 사실이 언론을 통해 폭로되면서 시작됐다.
당시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이 밀수를 ‘5대 사회악’의 하나로 규정해 놓고 있던 터라 파장이 컸지만 이 사건이 더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지게 된 계기는 김 의원의 오물 투척 사건이었다.
이날 밀수사건에 관한 대정부 질문이 열리고 있는 국회 본회의장. 질문을 하러 나선 김 의원은 갑자기 미리 준비해 온 오물통을 열고 국무위원석에 앉아 있던 정일권(丁一權) 당시 국무총리 등 각료들을 향해 인분을 뿌렸다.
“밀수 사건을 두둔하는 장관들은 나의 피고들이다. 사카린을 피고인들에게 선사한다”는 단죄의 외침과 함께였다.
느닷없이 벌어진 희대의 사건으로 정계와 사회는 발칵 뒤집혔다. 정 총리는 공관에서 긴급 간담회를 열고 전 국무위원 총사직을 발표했다. 국회는 의장단과 여야 총무 회담을 열어 김 의원 제명을 결정했다.
또 사건 당일 이병철(李秉喆) 당시 한국비료 사장은 기자회견을 열고 한국비료를 국가에 헌납하고 중앙매스컴과 학교 법인은 물론 모든 사업 경영에서 손을 떼겠다고 밝혔다.
오물 투척 사건은 세상을 진동시켰을 뿐 아니라 김 의원의 정치 생애에서 하이라이트였지만 동시에 그의 퇴장을 알리는 신호탄이기도 했다.
사건 직후 구속된 그는 풀려난 뒤 1972년 세상을 뜰 때까지 실의에 차 세월을 보냈다고 한다. 손을 대는 사업마다 실패하는 탓에 주변에서는 보이지 않는 세력이 그의 사업을 방해했다는 의혹도 나돌았다.
오물 투척 사건은 이제 ‘앗, 세상에 이런 일이’ 수준에서 인구에 회자되는 정도로 남았지만 2년 전 한 드라마를 통해 이 사건이 묘사됐을 때 상당수 시청자는 ‘통쾌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난세를 거칠게 통과한 ‘야인(野人)’ 김두한이 계속 기억되는 이유도 거기에 있을 것이다.
김희경 기자 susann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