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마을운동의 3대 정신은? 1970년대에 학교를 다닌 세대는 ‘근면 자조 협동’이란 정답이 금방 떠오를 것이다. 당시 사회 시험의 단골 문제여서 달달 외워야 했기 때문.
1970년대 온 국민의 새벽잠을 깨운 것도 ‘새벽종이 울렸네. 새 아침이 밝았네’로 시작되는 ‘새마을 노래’였다.
새마을운동은 1972년 3월 7일 지방장관회의를 주재한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시작됐다. 그는 “새마을운동은 비생산적인 인습을 타파하는 운동이 돼야 한다”며 “농촌뿐만 아니라 도시에서도 그 내용은 다를지라도 (새마을운동이) 일어나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새마을운동은 낙후된 농촌에 경쟁을 불어 넣었다. 정부는 1971년 전국 3만3000여 마을에 시멘트 335포대씩을 무상 지원했다. 이 중 1만6000여 마을만 그 시멘트로 빨래터를 고치고 다리를 놓았다. 정부는 다음 해 이들 마을에만 시멘트 500포대와 철근 1t씩을 추가로 보냈다.
박 대통령은 1973년 전국 새마을 지도자 대회에서 그 이유를 설명했다.
“무거운 짐을 실은 손수레를 끌고 고개를 올라가는 사람들이 있다고 하자. 자기들 힘으로 고개까지 올라가려고 애를 쓰고 있는 사람들은 뒤에서 조금만 밀어주고 도와주면 쉽게 올라갈 수 있다. 정부는 그런 부락을 우선적으로 지원하겠다.”
박 대통령은 농촌 지도자를 교육하는 새마을연수원을 불시에 방문해 교육생을 A, B, C등급으로 나눈 뒤 A등급을 받은 수료생의 마을에만 특별지원을 하도록 지시한 적도 있다.
일선 관료의 인사고과에 새마을운동의 성과가 큰 영향을 끼치자 마을 협동조합의 공동 작업을 자신의 업적인 것처럼 허위 보고하는 공무원도 생겼다.
새마을교육에 장차관뿐만 아니라 기업인 교수 언론인까지 동원되자 ‘유신독재를 유지하기 위한 세뇌 교육’이란 비판도 제기됐다.
1979년 박 대통령의 사망과 함께 싸늘히 식었던 새마을운동의 열기가 되살아난 것은 외환위기가 닥친 1997년 말부터. 서울의 한 유명 백화점은 1998년 2월 개점과 폐점을 알리는 음악으로 ‘새마을 노래’를 틀었다. ‘새마을운동 정신으로 돌아가 경제 난국을 극복하자’는 취지였다.
부형권 기자 bookum90@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