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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디자인 도시를 바꾼다]속옷같은 미학-신분증과 서식

입력 | 2004-05-06 18:59:00

산업자원부는 2002년 각종 공문서 디자인을 대폭 개선했다. 흰 종이에 검은 붓글씨체, 가는 테두리선으로 이뤄진 종래의 표창장(왼쪽)이 베이지색 종이, 전통문양을 강조한 테두리선, 위변조 방지를 위한 홀로그램, 발급기관 바탕로고 등으로 이뤄진 현대적인 양식으로 탈바꿈 했다.-사진제공 씨큐텍


《지난 6개월여 동안 한 지방자치단체의 서식(書式) 디자인 교체작업을 진행해 온 국내 유수의 시각디자인 회사인 D사는 최근 이 일에서 손을 뗐다. 한두 번의 설명회면 족한 기업체와 달리 이 지자체에서는 실무자부터 과장 국장 단체장까지 무려 7번의 설명회를 열어야 했다. 더욱 힘들었던 것은 공무원들의 ‘증거주의’. “새 디자인이 더 좋다는 증거를 보여 달라”는 요구에 시달렸다. 서식 발급 비용을 30% 낮출 수 있다는 시뮬레이션 결과를 설명했지만 공무원들은 계속 결정을 미뤘고, 견디다 못한 D사는 스스로 포기를 선언할 수밖에 없었다.》

관청이 발행하거나 사용하는 증명서와 신분증, 공문서, 그리고 각종 서식에도 디자인이 필요하다는 개념이 우리나라에 도입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 잘 디자인된 서식은 업무능률을 올려주는 것은 물론 관에 대한 주민의 친밀감을 높여 결과적으로 정부의 세수입을 늘려준다는 것이 민간기업이나 선진국의 경험이다.

그러나 D사가 손을 들 수밖에 없었던 사례에서 보듯 우리의 현실은 아직 척박하다.

● 佛 관련공무원 매년 디자인 전문대학원 보내 교육

현재 정부기관과 지자체가 사용하는 공문서 서식은 관련 법령이 정하는 정보만 기재하면 될 뿐 디자인의 세부사항에 관해선 별다른 규제가 없다.

행정자치부에 따르면 2002년 이후 이 서식 디자인의 교체를 ‘시도’한 공공기관은 전국적으로 20여곳에 이른다. 그러나 산업자원부, 특허청, 조달청, 서울시청 등 5, 6개 대형 기관을 제외하면 서식 교체에 성공한 사례는 별로 없다. 서식의 성격상 눈에 확 띄는 변화를 기대하기 힘들고 담당자들의 인식도 부족해 중도에 작업을 포기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주민등록증 등 항상 소지해야 하는 공문서도 디자인이 중요하지만, 실정은 서식의 경우와 다르지 않다. 과거의 주민등록증이 디자인에 문제가 있고 위변조도 쉽다는 등 불만의 목소리가 높아가자 정부는 1999년 교체작업을 단행했다. 이 디자인 교체를 주관한 조폐공사측은 “홀로그램, 미세문자 등 최첨단 보안요소를 적용해 개인정보 유출 방지에 중점을 뒀다”고 밝혔다.

그러나 새 플라스틱 주민등록증 역시 서체, 공간 처리, 재질, 촉감 등에서는 높은 점수를 받지 못했다. 여러 서체가 섞여 있고 사진과 표제글자가 너무 커 산만한 느낌을 준다는 비판이다. 홍익대 시각디자인학과 안상수 교수는 이 요령부득의 주민등록증 교체작업과 관련해 “관리자인 국가의 편의를 우선시하고 사용자인 국민을 위한 미적, 기능적 고려는 뒤로 밀어둔 대표적인 경우”라고 지적했다.

▽선진국의 ‘고객 제일주의’ 공문서 문화


가장 기본적인 형태의 공문서인 운전면허증의 경우 미국(왼쪽), 호주(오른쪽) 등에서는 각 지방정부가 자율적으로 디자인하기 때문에 서체, 사진 크기, 재질 등의 다양성을 꾀할 수 있다. 미국 운전면허증의 경우 주 지도들 그려넣는 경우가 많다.

프랑스는 매년 일정 수의 공무원을 디자인 전문대학원에 파견해 공문서 디자인을 연구하도록 하는 관학(官學) 연계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아름답고 편리한 공문서는 국민에 대한 서비스’라는 인식이 있기에 가능한 얘기다.

디자인 전문가들은 신분증이나 관공서 서식을 ‘속옷’ 디자인에 비유한다. 자동차 번호판, 길거리 휴지통처럼 쉽게 눈에 띄지 않지만 얼핏 드러나는 모습에서 해당국가의 디자인 수준을 가늠할 수 있다는 것. 호서대 송성재 교수(편집디자인 전공)는 “잘 디자인된 공문서는 전 국민을 대상으로 무료 디자인교육을 하는 효과도 있다”며 “이탈리아나 프랑스의 관공서 서식은 디자인이 뛰어나서 소장품 대접까지 받고 있다”고 말했다.

그에 반해 국내의 공문서 디자인은 주민등록증의 예에서 보듯 아직 ‘공급자 편의주의’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동사무소에 비치된 주민등록 등·초본 신청 서식도 1962년 주민등록법이 제정된 뒤 거의 변하지 않았다. 이 서식을 관리하는 행정자치부 담당자는 “이미 익숙해진 서식을 바꾸기가 쉽지 않다”고 설명했다.

2001년 예술의 전당에서 열린 공공디자인 전시회에서 증명서 분야를 기획한 인터그라픽의 김주성 실장은 주민등록, 호적·인감증명 등의 서류를 각기 다른 색상으로 제작하는 방안을 제안했다. 생각의 틀을 조금만 바꿔도 사용자는 보기 쉽고, 관리자는 분류하기 쉬운 공문서를 개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산자부 증서 바꾼뒤 비용-사고 줄어 ‘1석4조’ 효과

국가인권위원회는 2001년 출범을 앞두고 CI와 공문서 디자인 작업을 병행했다가 공문서 쪽은 포기했다. 예산 문제도 있었지만, 공문서는 담아야 할 정보의 양이 많아서 디자인 개발에 제약이 크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디자인 개념을 도입해 제대로 만든 공문서가 가져오는 효과는 ‘기대 이상’이다. 2002년 10여개 부서에서 자체적으로 만들어 오던 행정증서의 디자인을 통일한 산자부의 경우를 보자. 디자인을 통일하자 전산관리가 가능해졌고, 이 덕분에 위·변조 사고도 크게 줄었다. 각 부서의 증서 제작 비용도 당연히 줄었다.

당시 디자인 실무를 맡았던 씨큐텍의 류헌진 사장은 “디자인 개선은 단지 아름다움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면서 “품격 향상은 기본이고 관리업무 효율성 제고, 보안사고 방지, 비용 절감 등 1석4조의 효과를 거둘 수 있다”고 말했다.

정미경기자 mickey@donga.com

■ 디자이너 양성 시스템

단순 기술 인력보다 경영-기획능력 갖춘 프로 인재 길러내야

엽기 토끼로 알려진 ‘마시마로’는 국산 캐릭터로는 드물게 대중적 성공을 거둔 케이스다. 디자인이 그만큼 좋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소비자의 심리를 정확하게 읽고 적시에 마케팅을 해낸 뛰어난 기획자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게 업계의 정설이다. 실제 마시마로 성공의 대가도 디자이너보다는 기획자가 더 많이 가져가고 있다.

디자인에 있어 기획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다. 우리 디자인을 선진국 수준으로 업그레이드하려면 기획력을 갖춘 디자이너의 양성이 절실하지만 현실은 이와 거리가 멀다. 산업자원부의 ‘2000년 디자인 센서스’에 따르면 국내 기업들은 대학 디자인 교육에서 가장 취약한 분야가 ‘기획력 부족’(37%)이라고 지적했다.

국내 대학의 디자인학과들은 마케팅 관련 과목을 한두 개씩 개설하지만 이를 진지하게 가르치지도, 배우지도 않는다. 디자인계의 전반적 분위기가 예술적 관점을 중시하기 때문이다. 디자인적 상상력은 공학적 배경이 필요한 것으로 예술적 상상력과는 일정 부분 다른데도 말이다.

서울예술대 시각디자인과 구환영 교수는 “디자인학과의 70%가 미술대 소속이다 보니 디자인과 경영을 접목시키는 전통이 부족하다”면서 “경영 관련 이수과목 수를 늘리고, 경영대나 공대에 디자인 과목을 개설하는 방안도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기업의 디자이너 활용 기준이 모호한 것도 디자인 발전을 저해한다. 기업은 디자이너의 기획력 부족을 아쉬워하면서도 정작 디자이너 채용 때는 ‘실기 능력’ 위주로 뽑고, 입사 이후에도 기획이나 마케팅 분야의 일을 시킬 생각은 아예 하지 않는다.

디자이너가 경영 안목을 갖고 제품을 기획하는 능력은 단기간에 길러지지 않는다. 전문가들은 “디자이너의 기획력 보강을 위해선 대학 때부터 산업현장에서 실무를 배울 수 있는 산학(産學)협력 프로그램을 늘리는 것이 가장 시급하다”고 지적한다.

정미경기자 mickey@donga.com


미국(왼쪽 위), 독일(왼쪽 아래) 등 선진국의 인증서들은 국내 인증서(오른쪽 위)와 달리 위변조가 어렵도록 미세문자를 이용한 두꺼운 테두리선을 사용하며 발급기관 로고를 바탕 문양으로 처리한 것 등이 특징이다. 디자인업체 인터그라픽이 사진을 키우고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처리한 주민등록증 개선안(오른쪽 아래)를 만들어 봤다.-사진제공 씨큐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