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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디자인 도시를 바꾼다]도시의 표정-간판과 색채

입력 | 2004-05-05 18:52:00

빨강색은 너무 자극적이어서 미관을 해친다고 생각하기 쉬우나 디자인에 따라서는 온통 빨강으로 뒤덮였어도 얼마든지 아름다울 수 있다. 빨강 계통의 외벽과 아담한 간판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일본의 한 상점.-사진제공 지상현교수


《서울의 대표적 상업지역인 중구 명동거리. 건물은 물론 보행자 통로까지 온통 요란한 간판으로 뒤덮여 있다. 한 카페는 전면 간판과 돌출간판을 단 것도 모자라 유리창에 큰 글씨로 상호를 강조해 표기했다. 한 안경점은 건물 전면에 파란색 대형 간판을 3개나 단 뒤 유리창 사이의 벽면마다 5개의 세로 간판을 더 붙였다. 주택가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서울 서초구 한 아파트단지 안의 상가는 4층 건물 외벽이 온통 간판으로 뒤덮여 아예 벽이 보이지 않을 정도다. 서울시내 간판의 35%는 규격이나 부착 위치 등을 어긴 ‘불법’ 간판이다. 설사 적법한 간판이라 해도 필요 이상으로 크고 많고 현란하다는 데 전문가들과 시민의 시각이 일치한다.》

일반적으로 선진국의 간판은 위치나 규격 등 지킬 것은 지키면서도 개성을 표현하는, ‘통일성 속의 다양성(Variety in Unity)’을 갖고 있다. 유럽의 간판은 대체로 무채색에 작고 세련된 모양이며 일본의 간판은 전자상가로 유명한 도쿄 아키하바라처럼 혼란스러운 곳도 있지만 대개는 소박하고 작다. 일본풍이 물씬 풍기는 전통스타일도 많다.

그런가 하면 휘황찬란한 네온사인으로 대표되는 홍콩의 간판들은 화려하지만 번잡스럽지 않아 그 자체가 하나의 명물이다. 수천년간 내려온 중국 특유의 빨간색과 고급스러운 전통 문양이 어울려 홍콩의 특색을 잘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한국의 간판은 대부분 직사각형에 고딕체로 상호를 표시한, 천편일률적인 것들이다. 디자인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고 더구나 우리 전통미를 살린 간판은 눈을 씻고 봐도 없다. 그렇게 된 1차적 원인은 영세한 간판 제작시장 탓이다. 서울시 윤혁경 도시정비반장은 “달랑 휴대전화 하나 들고 영업하는 영세업자가 넘쳐난다. 여기엔 디자인 개념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고 말했다. 이에 덧붙여 ‘간판이 두드러져야 돈벌이가 된다’는 상인들의 경쟁심리까지 가세해 ‘싸구려 재료’로 ‘주변 경관과 상관없이 무조건 크게’ 만든 저질 간판이 넘쳐나는 게 21세기 한국의 도시 풍경이다.

●건국대앞 노유거리 간판 정비한 뒤 손님 50% 늘어

월 서울 종로에서 ‘아름다운 간판 전시회’가 열렸다. 하얀 바탕에 작은 글씨로 상호를 표시해 ‘여백의 미’를 강조한 신림동의 카페 ‘나무사이로’가 금상을 차지했다. 은상을 받은 청담동의 옷가게 ‘옥동’은 세로 나무판에 상호를 철 상감해 고풍스러운 느낌을 줬다. 간판에 대한 고정관념을 벗어나려는 시도가 드디어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의류상점이 많은 서울 광진구 건국대 앞 노유거리는 2년 전 ‘패션거리’의 이미지에 걸맞게 간판을 정비한 뒤 거리 전체가 활기를 찾은 케이스. 광진구청측은 이 지역 상인들을 일일이 찾아가 ‘바꾸면 이렇게 좋아진다’는 시뮬레이션 결과를 보여 주고 불법간판에 대해선 과징금을 물리는 등 끈질긴 노력 끝에 ‘큰 간판’에 집착하던 상인들의 마음을 돌릴 수 있었다. 노유거리의 한 상인은 “간판 정비 전에 비해 손님이 50% 이상 늘었고 꼭 쇼핑을 안 해도 구경하는 사람이 많아져 거리가 하나의 명물이 됐다”며 자랑스러워했다.

서울시는 이화여대 정문 앞, 종로 등지에서도 간판을 포함한 가로환경 정비사업을 하고 있거나 할 계획이다. 하나의 상점이 세련된 간판을 내거는 것도 중요하지만 거리 전체를 바꿔야 유동 인구가 늘고 상권도 살아난다는 것이 서울시측의 설명이다.

●주변 건물-도로 색깔과 어울리는 세련된 배색 필요

판 정비는 어떤 방향으로 이뤄져야 할까. 볼품없이 크기만 한 간판들을 보다 단정하고 세련된 모양새로 정비해야 할 필요는 분명히 있지만 그렇다고 획일적 기준을 적용하면 곤란하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했다.

성균관대 김도년 교수(도시계획 전공)는 “무질서한 간판을 정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역과 업종의 특성을 살리는 것이 더 중요할 수 있다”고 말했다. 예컨대 한옥마을로 유명한 서울 종로구 가회동과 안국동 인근의 상가에 강남 테헤란로의 현대식 빌딩군에서와 같은 규격의 간판을 강요하면 또 다른 흉물로 전락할 수 있다는 것.

그뿐이 아니다. 간판의 색이 도시 전체의 색조를 좌우한다는 점도 잊어선 안 된다. 건물의 주조 색 및 보도 색과 조화를 이뤄 간판이 도시의 색깔을 연출할 수 있도록 유도할 필요가 있다.

숙명여대 기업정보디자인센터 김영미 책임연구원은 “일부 지방자치단체는 ‘빨강색 간판은 안 된다’는 방침을 고수하고 있는데 이는 잘못”이라며 “디자인 개념만 있으면 빨강 간판도 얼마든지 아름다울 수 있다”고 말했다. 상업지역은 다양한 색채로 개성을 나타낼 수 있게 하되 채도를 조금 낮추고 주거지역은 무채색으로 하는 식으로 미감을 살릴 수 있다는 얘기다.

한성대 예술대 지상현 교수는 “간판을 포함한 우리나라 거리 색채에는 심리학적으로 긴장을 유발하는 배색이 많은 반면 일본의 경우 중간색을 많이 사용해 긴장도를 완화하고 있다”면서 “이제는 우리도 고유의 거리 색채를 다양하게 개발해야 할 때”라고 말했다.

채지영기자 yourcat@donga.com


간판 디자이너 김영배씨가 경기 고양시의 한 건물에서 외벽을 완전히 뒤덮은 간판을 떼어내고 1층에만 전면간판을 달고 다른 층은 돌출형 간판을 다는 형태로 시뮬레이션을 해봤다. 건물이 한결 깨끗해보인다.

■ 규제냐 자율이냐

개인 소유인 간판 등 옥외광고물에 대한 정비를 관의 규제 아래 두어야 하는지, 아니면 민간 자율에 맡겨야 하는지 논란이 분분하다.

대부분의 선진국은 간판에 대해 엄격한 규제를 실시하고 있다. 미국 뉴욕은 타임스 스퀘어를 제외한 모든 곳에서 간판에 깜빡이는 조명을 설치할 수 없다. 맨하탄 5번가에서는 돌출형 간판을 찾아볼 수 없다.

프랑스 파리에서는 간판 설치에 앞서 그 모양을 신고해야 한다. 세계적인 패스트푸드 체인인 맥도널드의 노란 ‘M’자도 파리 샹젤리제 거리에서는 하얀 글자로 바뀔 수밖에 없었다.

반면 일본에선 주민들이 주축이 된 각종 위원회가 자율적으로 규칙을 정해 자체 정비에 나서는 경우가 많다. 또 홍콩은 시민의 안전에 위협이 되지 않는 한 간판에 별다른 규제를 하지 않는다.

서울시 윤혁경 도시정비반장은 “간판 문화에 대한 시민의 의식수준이 낮고 제작시장도 협소한 우리 현실에서는 자율에만 맡길 경우 좋은 디자인의 간판이 나오기 힘들다”며 “간판 등 광고물은 어느 정도 규제가 불가피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어디까지 규제해야 할지는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 한성대 지상현 교수는 “규제만 앞세우면 사람들은 어떻게든 규제를 벗어나는 방법을 찾아낼 것”이라며 “서울시의 ‘종로 업그레이드 프로젝트’처럼 시범가로를 정해 우선 정비하는 방안이 현재로서는 최선”이라고 말했다.

한군데서 간판을 정비해 유입인구가 늘고 주변 상점의 매출이 올라가면 자연스럽게 다른 지역들도 따라올 것이라는 얘기다. 간판업 종사자에 대해 일정시간 디자인 교육을 실시하는 방안도 고려해볼 만하다고 덧붙인다.

간판 디자이너 김영배씨는 “간판은 하나의 문화이기 때문에 단기간에 뜯어고치기는 불가능하다”며 “규제와 함께 간판에 대한 시민의식 개선 작업을 병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채지영기자 yourcat@donga.com


웨딩숍의 이미지를 살린 ‘뜨레비’와 여백의 미를 살린 ‘아회’ 처럼 아담하고 세련돼야만 좋은 간판은 아니다. 필라 간판은 크지만 부드러운 조명과 색상이 조화를 이룬다. 간판이 잘 정비된 영국 런던의 한 건물(오른쪽 아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