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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노블리안스]고기정/사회적합의 빠진 마일리지 공방

입력 | 2004-02-08 17:26:00


공정거래위원회는 최근 대한항공에 대해 공정거래법 위반 혐의를 적용해 800억원에 가까운 과징금을 매기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밝혔습니다.

공정위가 당초 제시했던 약관법 위반 혐의에 따른 검찰 고발과 비교하면 제재 수준이 800배 가까이 강화됐습니다. 약관법 위반에 대한 벌금 한도액은 1억원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공정위가 이 같은 ‘극약처방’을 들고 나오기까지의 과정은 이렇습니다.

대한항공은 2002년 11월 약관을 고쳐 고객들에게 공짜 비행기표를 제공하는 마일리지 혜택을 대폭 축소한다고 밝혔습니다.

그러자 공정위는 작년 6월 개정 약관을 심사해 마일리지 혜택 축소의 근거가 된 조항을 무효화시켰고 이에 따라 대한항공은 유예기간을 조금 더 연장했지만 공정위가 추가 연장을 요구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지금까지 몰랐던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공정위가 작년 6월 결정한 내용은 항공사가 마일리지 규정을 소급해 적용할 수 없도록 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사실은 혜택을 축소하기까지 유예기간을 충분히 두라고 요구했다는 것입니다.

언론은 일제히 ‘공정위가 말을 바꿨다’고 비판했고, 공정위는 해명자료를 내느라 분주했습니다.

마일리지 논쟁이 공정위의 미숙한 일처리에 대한 논란으로 옮겨 붙은 것입니다. 공정위가 대규모 과징금 카드를 내놓은 것도 이에 대한 반작용 때문이라는 시각도 있습니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부분은 한쪽으로 밀려나 있었습니다. 이는 기업이 고객에 대해 지켜야 할 의무와, 고객이 수용해야 하는 기업에 대한 이해입니다.

한국 항공사들은 고객 확보를 위해 외국사들보다 후한 마일리지 혜택을 제시했지만 그 자체가 경영을 위협하자 일방적으로 이를 축소키로 했습니다.

이에 따라 고객들은 정부를 대리인으로 앞세워 항공사들을 밀어붙였습니다. 여기에 공정위의 ‘말 바꾸기’ 논란까지 일면서 문제가 더욱 꼬여 버렸습니다.

이 과정에서 생산자와 소비자가 도출해야 하는 사회적 합의는 빠져 버렸습니다. 항공사는 고객에 대한 약속을 저버린 대가를 받되 소비자는 기업의 상황을 이해하는 과정이 삭제된 것입니다.

정부가 제대로 된 중재자 역할만 했더라면 기업과 고객이 거쳐야 하는 수준 높은 훈련 과정이 될 수 있었을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고기정기자 koh@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