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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이야기]싼맛에 질린 日중산층 “비싸도 좋다”

입력 | 2003-08-28 17:24:00

장기불황 속에서 '더 싼 것'만을 찾아오던 일본 중산층들이 요즘들어 '제대로 된 고가품'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사진은 손님으로 북적대로 있는 도쿄 긴자의 에르메스 매장. -사진제공 아사히신문


도쿄(東京)의 ‘패션 1번지’인 아오야마(靑山)의 루이뷔통 매장은 15일을 기해 제품 값을 평균 5.5% 올렸다. 매장 매니저는 “엔화가치 하락으로 수익성이 나빠져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하면서도 갑작스러운 가격 인상이 매출감소로 이어지지 않을까 걱정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TV 카메라가 소비자들의 반응을 살피겠다며 아오야마 거리로 나섰다.

소박한 옷차림의 50대 주부는 한숨부터 내쉬었다. “경기가 나빠서 큰일인데 가격을 올리다니 기분이 좋지 않네요. 어차피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지만….”

그러나 정작 ‘진짜 손님’의 반응은 무덤덤했다. 쇼핑백을 한 아름 들고 막 매장을 나선 20대 후반의 직장여성. “이게 오른 가격이에요? 음, 상관없어요. 갖고 싶던 가방이니까.” 어차피 살 사람은 물건 값이 올라도 산다는 것이다.

디플레이션(경기 침체 속 물가하락)이 10년 넘게 계속되는 일본에서 ‘가격인상’은 어느새 낯선 단어가 됐다. 파는 쪽이나, 사는 쪽이나 값이 떨어지는 데만 익숙해졌다.

가격인하의 상징인 맥도널드의 매장. 일본에서 햄버거 값을 590원까지 낮춰 한때 폭발적인 인기를 모았으나 요즘에는 오히려 비싸도 맛 좋은 햄버거를 찾는 고객이 늘고 있다.사진제공 아사히신문

아키하바라(秋葉原)나 신주쿠(新宿)의 전자제품 양판점에서는 물건 값의 20%를 포인트로 환산해 다음에 살 때 깎아주는 것도 모자라 요즘은 상품구입 직후 즉석에서 20%를 현금으로 돌려주기도 한다.

장기불황이라지만 일본은 가구당 평균 금융자산이 미국에 이어 세계 2위인 부자나라. 지난해 연수입이 3000만엔(약 3억원)을 넘는 고소득자가 24만명에 이른다.

도쿄의 중산층쯤 되면 상품을 보는 안목이나 서비스에 대한 기대수준이 높아 웬만한 품질로는 만족하지 못한다. 한쪽에서는 ‘가격파괴’ 열풍이 여전히 거세지만, 다른 한쪽에서는 가격 인하로 인해 상품의 질과 서비스가 떨어지는 것에 제동을 거는 움직임이 최근 부쩍 활발해졌다.

패스트푸드 업계에서 작년까지 대히트를 쳤던 맥도널드 햄버거. 물가가 비싸기로 유명한 도쿄에서 한 개에 200∼300엔 하던 햄버거 값을 59엔(약 590원)까지 낮춰 젊은 층의 발길을 끌어 모으는 데 성공했다.

소비자들은 처음엔 싼값에 솔깃했지만 59엔짜리 내용물이 빈약하리라는 것은 안 봐도 뻔한 법. ‘허기를 채워주지도 못하고 맛도 별로’라는 입소문이 퍼지면서 맥도널드의 매출과 이익은 빠르게 줄었다.

경쟁업체인 모스버거는 ‘두께와 맛이 다르다’는 선전과 함께 고급형 ‘일본의 버거’ 시리즈를 13일부터 내놓았다. 양질의 고기와 샐러드를 듬뿍 담은 640엔짜리 햄버거를 매일 점포당 10개씩 점장이 직접 요리하는데 내놓자마자 금방 팔린다. 제 값을 내고 제대로 된 햄버거를 먹고 싶어 하는 도쿄 직장인들의 심리와 맞아 떨어졌다고 마케팅 전문가는 분석한다.

혼다자동차가 최근 신차 ‘인스파이어’에 첨단 사고방지장치를 추가하면서 표준모델보다 80만엔 비싼 가격표를 내걸자 주문이 쇄도하고 있다. 소니의 초소형 디지털카메라 ‘쿠오리아’도 일반 상품보다 10배나 비싼 가격(38만엔)에도 불구하고 예상보다 잘 팔린다는 소식.

일본의 불황과 함께 쇠퇴기미가 뚜렷했던 긴자(銀座) 거리가 되살아나는 것도 ‘돈 있는 도쿄 토박이’가 움직였기 때문이다.

보석브랜드인 카르티에는 지난달 긴자 한복판에 카르티에의 전 세계 212개 매장 중 최대규모의 점포를 오픈했고 프라다와 페라가모도 올 들어 새 매장을 열었다. 긴자 매장이 돈을 쓸어 담는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카르티에 옆 공터에서는 샤넬이 내년 개점을 목표로 공사를 진행 중이고 크리스티앙디오르와 구치도 점포자리를 물색 중이다.

골목 안에 숨어있던 고가의 브랜드제품 매장이 큰길가로 속속 진출하면서 긴자의 거리풍경도 한결 밝아졌다.

카르티에 매장이 오픈한 날에는 문을 열기 몇 시간 전부터 줄을 서기 시작해 개점 기념으로 준비한 30만엔짜리 액세서리가 순식간에 팔렸다.

긴자 브랜드매장을 찾는 이들이 중시하는 건 상품의 브랜드와 쇼핑 분위기. 가격은 그리 중요한 조건이 아니다.

미쓰코시(三越)백화점 내 매장을 두고 있는 가방 브랜드 코치는 바로 50m 떨어진 곳에 별도의 자체 점포를 운영 중이다. 미쓰코시 매장에서 백화점 카드를 이용하면 물건 값의 5%가 할인되지만 판매 실적은 자체 점포 쪽이 더 높을 때가 많다. 이 곳에서 가방을 산 한 여성은 “아무래도 손님으로 대접받는 느낌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불황의 터널을 오래 지나다 보니 일본 소비자들도 ‘허리띠를 더 바짝 졸라매는 알뜰파’와 ‘기왕 쇼핑할 바엔 돈 아끼지 않겠다는 안목파’로 나눠지는 양상이다.

박원재 특파원parkwj@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