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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설수설]홍찬식/007

입력 | 2003-01-02 18:13:00


할리우드 영화는 일정한 틀을 지니고 있다. 영화 속 남녀 주인공은 백인 일색이다. 이들은 얼굴이 잘생기고 몸매도 쭉쭉빵빵 늘씬하며 부자들이다. 유색인은 악당으로 나오는 경우가 많은데 가난하고 섹시한 매력도 없으며 무지한 집단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또 다른 특징은 서방세계를 정의로운 선의 집단으로, 나머지 세계를 악의 집단으로 설정해 결국 서방세계가 승리를 거두는 것이다. 영화 007시리즈는 이 같은 할리우드의 기본 틀이 잘 용해되어 있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할리우드 제작자들이 고의적으로 서방세계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정당화하기 위해 이 같은 얼개를 채택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서방세계가 만든 영화이므로 그들의 세계관 가치관이 드러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로 보아야 한다. 영화는 세계에서 가장 인기있는 대중문화이며 세계 영화시장의 80% 이상을 할리우드 영화가 장악하고 있다. 이처럼 현실적으로 할리우드의 파워가 막강하기 때문에 이를 반복적으로 보면서 그들의 논리나 선입견에 동화될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다. 우리로선 할리우드 영화를 오락으로 즐기되 비판적 안목도 함께 갖춰야 한다.

▷007 ‘어나더데이’가 뜨거운 논란을 빚고 있다. 개봉 이전부터 인터넷에서는 ‘안티 007운동’이 벌어졌다. 북한을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한반도 냉전을 부추긴다는 이유다. 영화가 시작된 후 한 시민단체는 상영관 앞에서 영화를 보지 말자는 캠페인을 벌였다. 영화가 좋고 나쁨에 대한 의사 표시는 영화팬 모두의 즐겁고도 짜릿한 권리다. 영화를 본 사람은 누구나 혹평을 가할 자격이 있다. 그러나 이번 사례가 좋고 나쁨을 가리는 수준을 넘어 불매운동의 성격을 띠고 있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문화활동에서 가장 존중되어야 할 것이 ‘창작의 자유’다. 문화계에서 외설 작품에 대해서까지 법적 제재를 반대하는 이유는 혹시라도 그로 인해 창작의 자유가 위축될 것을 우려하기 때문이다. ‘어나더데이’에 대한 불매는 우선 우리 내부의 ‘표현의 자유’를 해치는 결과를 피할 수 없다. 할리우드의 세계 지배 이데올로기에 염증을 느껴 이 영화에 반대한다면 우리는 어떤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우리 대중문화 작품들이 우리보다 못사는 나라를 어떻게 묘사하고 있는지도 살펴야 한다. 기본적으로 영화에 대한 평가는 관객의 판단에 맡기는 것이 바람직하다. ‘누가 뭐래도 나는 꼭 007을 보아야겠다’는 사람들이 불매운동으로 인해 영화관에 들어가면서 괜히 떳떳하지 못한 기분을 갖게 만든다면 그것은 횡포가 아닐 수 없다.

홍찬식 논설위원 chansi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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