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결정족수를 채우지 못한 상태에서 7, 8일 불법 통과된 법안 47건을 재의결한 12일 국회 본회의장.
박관용(朴寬用) 국회의장이 전날 대국민 사과까지 하고 개원 이래 처음으로 재의결을 했지만, 여기서도 ‘불법행위’는 그치지 않았다. 일부 의원들이 불출석한 옆자리 의원을 대신해 대리투표를 자행한 것.
본회의 시작 30분이 지난 오전 10시50분경 민주당 박상희(朴相熙) 의원의 손이 불출석한 옆자리 김희선(金希宣) 의원의 전자투표기 버튼을 누르는 장면이 목격됐다. 박 의원은 좌석 오른쪽에 있는 자신의 버튼을 누른 뒤 김 의원의 버튼도 눌렀다. 그는 법안 3개에 대해 ‘대리투표’를 되풀이했다. 본회의장 앞 전광판에는 자리에 없는 김 의원 이름 앞에 ‘찬성’을 뜻하는 녹색 등이 켜졌다. 보다못한 국회 여직원이 다가가 “우리가 괜히 여기 있는 줄 아세요”라고 말하자 박 의원은 겸연쩍은 듯 옆자리로 뻗었던 손을 거뒀다.
그러나 박 의원은 회의가 끝난 뒤 부인으로 일관했다. 대리투표한 이유를 묻는 기자에게 그는 “절대 그런 적 없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말라”며 거듭 시치미를 뗐다. 국회 의사국 기록을 통해 불출석한 김희선 의원이 표결에 참여한 것으로 확인된 후에도 그의 거짓말은 계속됐다.
한나라당 이상배(李相培) 정책위의장도 회의 말미에 자리를 뜬 임인배(林仁培) 의원의 전자투표기 버튼을 대신 눌러주다 기자들에게 들켰다. 이 의장은 “임 의원이 누굴 만나러 간다기에 대신 투표했다”고 대리투표를 시인했다. 그러나 그는 회의 후 기자들에게 일일이 전화를 걸어 “한 번만 봐달라”고 통사정했다.
회의 후 한나라당 이상희(李祥羲) 의원 등 여러 의원들은 “대리투표를 막기 위해 전자투표기에 지문인식장치를 설치해야겠더라”고 말했다. 의원들의 이런 우려에 비춰볼 때 이날 본회의장에서 대리투표가 더 있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국회는 표결에 대한 책임 강화를 위해 97년 9억1000만원을 들여 본회의장에 전자투표기를 설치했다. 그러나 일부 의원들의 상식 이하의 행동 때문에 또다시 거액의 예산을 들여 첨단장치까지 설치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는 현실 앞에서, 과연 이들이 법을 만들 자격이 있는 사람인지 회의감을 지울 수 없었다.
윤종구기자 jkma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