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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일기]남편의 이발기구

입력 | 2002-04-25 15:27:00


검소와 검약이 몸에 밴 내 남편에게는 남과 다른 두 가지의 취미가 있다. 첫번째는 다른 사람의 귀 파주기이다. 틈만 나면 다 큰 아들애를 자기 무릎에 눕히고 귀를 파는데 귓속의 이물질이 많이 나올수록 희열을 느낀다니 남다르달 수밖에….

2, 3년에 한 번 칠백리밖 고향의 노모가 올라오시면 자주 오시기 힘든 먼 거리라서 두어달 묵어가시는데 그럴 때마다 그야말로 진풍경이 벌어진다. 어머님의 귀 파드리기가 시작되면 나와 작은 아이는 손전등을 들고서 벌 아닌 벌을 서게 된다. 어머님의 묵은 귀지를 제거할 때 남편은 더욱 신나한다. 남편에게 손전등 조준 똑바로 못한다고 핀잔도 듣고 팔이 아프도록 벌을 서지만 애들에겐 어른을 공경하는 산교육이 되는 것같아 내심 남편에게 고맙기도 하다.

남편의 또 하나의 남다른 취미는 두 아이들 이발해주기이다. 애들은 커가면서 이발소나 미장원으로 가겠다고 하지만 남편은 몹시 바쁠 때를 제외하곤 이제껏 자신의 취미생활을 고수했었다.

신학기가 지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지난달 중순 얘기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남편은 이발을 하자고 바람을 잡고 두 아이들의 반응은 심드렁했다. 특히 올해 고등학생이 된 큰 아이는 노골적으로 난색을 표했다. 애들에게 이발비를 주면서까지 이발을 마친 남편에게 내가 그만 “애들이 그토록 싫다고 하는데도 취미생활을 계속해야 하냐, 아무리 수년 동안 애들 상대로 갈고닦은 솜씨지만 당신 실력이 국가시험 패스한 이발사, 미용사와 같느냐”고 하자 화가 난 남편은 이발기구들을 챙겨서는 내다버린다고 밖으로 나갔다. 나는 순간 미안한 마음에 “내가 이 다음에 우리 늙어지면 내가 당신 머리 다듬어줄게. 내버리지마”라고 했지만 남편은 그냥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로부터 며칠 뒤 나는 보았다. 현관 밖 신발장 서랍 속에 들어 있는 남편의 이발도구들을….

이운순 43·주부·경기 포천군 소흘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