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을 위해 휴전선을 넘었지만 남은 건 가난과 사회부적응자라는 낙인뿐이다.”
6·25전쟁 발발 이후 북한에 잠입해 각종 특수임무를 수행했던 북파공작원 문제가 최근 서울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있은 시위를 계기로 본격적으로 수면 위로 떠올랐다.
북파공작원들은 정부가 자신들을 ‘인간병기’로 이용한 뒤 폐기 처분했다며 자신들의 존재를 인정할 것과 적절한 보상을 해 줄 것 등을 요구하고 있다.
▽실체〓북파공작원들은 북한으로 잠입해 관공서나 군부대의 비밀문서를 빼오거나 요인을 납치하는 등 특수임무를 수행한 사람들을 일컫는다. 이들은 주로 HID(Headquarters of Intelligence Detachment)라는 특수부대에 소속돼 작전에 투입됐으며 일반인의 눈에 안 띄는 곳에 주둔한다고 해 ‘안전가옥팀’이나 ‘목장팀’으로 불리기도 했다.
이들은 ‘물색조’라는 군 정보사 요원에 의해 포섭되거나 ‘특수부대 모집’을 통해 뽑힌 사람들로 아직 이들의 정확한 수와 사망자 및 실종자 등에 관한 공식 통계는 없다.
다만 민주당 김성호(金成鎬) 의원이 2000년 10월 ‘북파공작원 현황’에서 1952년부터 72년 7·4남북공동성명 때까지 파견된 북파공작원 수만도 대략 1만여명이며 이 중 7726명이 사망했거나 실종됐다고 밝힌 게 전부다.
북파공작 특수임무 전국설악동지회(회장 이동안·李東安)측은 68년 이후 지금까지의 북파공작원이 1700여명이고 이 중 소재가 파악된 사람은 700여명 정도라고 밝히고 있다.
▽활동 및 비인간적인 대우〓58년 3월 강원 고성지역 작전에 투입된 여모씨(72)는 “동료 4명과 함께 작전에 나섰다가 인민군과 총격전까지 벌이게 됐다”며 “이 과정에서 왼쪽 다리에 관통상을 입고 가까스로 살아 돌아왔다”고 말했다.
속초지역의 36지구대에서 근무했던 여씨는 계급은 물론 군번도 없었으며 59년 7월 제대할 때까지 10여 차례 휴전선을 넘었다.
66년부터 2년 6개월여간 북파공작원 생활을 한 한모씨(56)는 67년 9월20일 강원 동부전선의 한 지역에서 북한군 막사를 폭파하고 북한군을 사살했으며 이 과정에서 동료 4명이 전사했다고 회고했다.
차모씨(51)는 “낮에는 30㎏이 넘는 모래 배낭을 메고 체력 훈련을, 밤에는 침투나 암살 같은 특수임무를 배웠다”며 “실전 투입을 차라리 ‘휴가’로 생각할 정도로 가혹한 훈련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는 “북한군의 군복 차림에다 훈련도 북한식으로 받았고 국가도 애국가 대신 북한 국가를 불렀다”고 전했다.
82년 북파공작원이 된 김모씨(40)는 “탈영하려다 잡혀온 동기생 목에 ‘배신자’라는 팻말을 붙이고 동료들로 하여금 나무몽둥이로 때려죽이게 한 적도 있다”고 털어놓았다.
▽문제점〓북파공작원들은 정부로부터 보상을 받기는커녕 그 존재조차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대부분 혹독한 훈련의 후유증과 제대후 요시찰인물로 감시받는 등 사회에 잘 적응하지 못하고 있으며 부상으로 정상적인 생활이 어려운 사람도 많다. 성격 이상으로 10여차례 직장을 옮긴 사람도 있다.
이런 현실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보상을 받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국가유공자 예우 등에 관한 법률’은 희망자에 한해 개별적인 보상 신청을 하도록 하고 있으나 정부가 이들의 실체를 인정하고 명단을 만들지 않는 한 신청하더라도 북파된 사실을 증명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부로서도 이들의 존재를 인정하기가 곤혹스러운 측면이 있다. 남북관계에 악영향을 미칠 게 뻔하고 군 내부에서 살인 및 살인 방조가 행해졌음을 인정하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실제 국방부는 이들의 실체에 대해 ‘노 코멘트’로 일관하고 있다.
이진구기자 sys1201@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