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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산책]"속도위반 결혼이 어때서…"

입력 | 2001-08-05 18:42:00


일본에서는 ‘속도위반 결혼’을 ‘데키찻타 결혼’이라 부른다. ‘데키찻타(てきちゃった)’란‘생기고 말았다’는 뜻. 그만큼 ‘뜻하지 않은 임신’ ‘갑작스러운 결혼’에 대한 당혹감이 담긴 표현이다.

지금 일본에는 ‘속도위반 결혼’이 자랑거리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숨길 만큼 창피한 일도 아니라는 인식이 퍼지고 있다.

‘데키찻타 결혼’이란 말이 일본에 유행하게 된 것은 한국에도 팬이 많은 유명 여가수 아무로 나미에(安室奈美惠·23)가 97년 임신을 한 뒤 결혼 계획을 발표한 것이 계기가 됐다. 이때 스포츠지는 호외까지 발행하며 호들갑을 떨었다.

그 후 임신 사실을 밝히면서 결혼 계획을 발표하는 연예인이 늘어났다. 그 배경에는 어차피 나중에 소문이 날 바에야 미리 임신 사실을 밝히는 것이 ‘책임감 있다’는 인상을 줄 수 있어 인기 관리에 도움이 된다는 매니저들의 판단도 깔려 있다.

연예인들의 ‘속도위반’ 공표는 일반인들에게도 영향을 미쳐 ‘창피함’을 덜어준 것 같다. 얼마 전 일본의 한 TV방송 취재진이 ‘속도위반 결혼’을 하는 두 곳의 결혼식장을 찾아가 하객의 반응을 들어봤다. 82명 중 63명이 “속도위반 결혼이라고 해서 창피한 일은 아니다”고 대답했다. 하객 처지에 신랑 신부가 쑥스러워 할 것 같아 이런 대답을 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속도위반 결혼을 하는 사람이 실제로 크게 늘고 있는 것을 보면 일반인의 생각이 확실히 달라졌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속도위반 결혼에 대한 통계가 없어 TV방송 취재진들은 결혼식을 치르는 호텔과 결혼예복전문점을 상대로 조사해 봤다. 예복 주문시 신부의 임신 여부를 어느 정도 알 수 있기 때문.

이를 근거로 추산한 결과 70년대 8%, 80년대 10%에 불과했던 속도위반 결혼이 90년대 15%로 늘었고 2000년과 2001년에는 30.1%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렇다 보니 요즘은 신부 측이 임신 여부를 밝힐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재단사가 미리 물어보기도 한다는 것.

일본 여성의 결혼 연령은 요즘 늦어지고 있다. 독신자도 늘고 있다. 문부과학성 산하 일본 청소년연구소가 지난해 7월 서울 뉴욕 파리 도쿄(東京) 지역 중고생을 상대로 결혼관 등을 조사했다. 일본 여자 중고생 중 “결혼은 꼭 하겠다”고 답한 학생은 20%에 불과했다. 한국은 50%, 프랑스는 30%, 미국은 80%대였다.

재미있는 것은 속도위반으로 결혼한 이들 가운데 64%가 ‘속도위반’의 ‘장점’으로 “결혼의 계기가 됐다”는 점을 들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속도위반’이 출산율 저하에 고민하는 일본에는 도움이 되고 있는지 모른다.

kssh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