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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경택칼럼]산 자를 위한 장례식

입력 | 2001-07-04 18:37:00


철학자들은 말한다. 인간만이 죽음이 있다고. 인간 이외의 다른 생물의 죽음은 죽음이 아니다. 단지 없어지는 것뿐이다. 오직 인간만이 죽을 줄 안다. 죽음을 두려워하고, 그래서 그것을 이겨내려고도 하고, 그것을 맞을 준비를 하기도 한다. 죽음이 있기에 삶은 삶으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빛은 어둠이 깊을수록 그 존재를 분명하게 하듯이 삶의 의미와 가치 또한 죽음이 있어 더욱 극명하게 부각된다. 이런 의미에서 산 자를 위한 장례식은 죽음과 함께 삶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며칠전 뉴욕타임스(NYT)는 암으로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는 전직 초등학교 교사(65)가 친지 친구 100여명을 뉴저지주 모리스타운 자신의 집에 초청해 미리 장례식을 치른 사실을 상세하게 보도했다.

이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들은 집주인의 애창곡을 기타로 연주하거나 시를 낭송해주기도 하고 그의 봉사활동 업적을 칭송하기도 했다. 턱시도 차림으로 휠체어에 앉아 자신의 장례식을 치른 그 선생님은 답사를 통해 “나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죽을 것인지를 보여주고 싶었다”고 했다.

산 사람을 위한 장례식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수년전 미국 매사추세츠주 브랜다이스대학에서 평생 사회학을 강의한 모리 슈워츠 교수가 루게릭이라는 병에 걸려 죽음을 앞두고 ‘사전(死前)장례식’을 가진 바 있다. ABC TV의 ‘나이트라인’에도 여러 번 출연해 유명해진 모리 교수는 죽기전 서너달 동안 매주 화요일 한 제자와 만나 인생을 얘기했고 이것을 묶은 책이 베스트셀러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미치 앨봄 지음·공경희 옮김)이다.

그는 제자에게 말했다. “어떻게 죽어야 할지 배우게 되면 어떻게 살아야 할지도 배울 수 있다네.” 그리고 언제든지 죽을 수 있도록 준비를 하면 더 적극적인 삶을 살 수 있다고도 했다. 죽음을 생각하는 것은 자신을 되돌아보는 진지한 자기 반성이며, 그같은 반성은 삶에 대해 보다 겸허하고 진실한 자세를 갖게 한다는 얘기일 것이다.

죽음을 안다는 것은 자신의 한계를 아는 것이다. 비록 죽음이 임박한 상태는 아니더라도 고령이 될수록 자기 생을 돌아보는 시간이 많아지고 그래서 마음을 비워나가는 것이 보통사람들의 삶의 과정일 것이다.

그러나 예외의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대개 정치하는 사람들이다. 노욕(老慾)의 증세는 정치하는 사람들한테서 유독 심한 듯 하다. 어떻게든지 권력의 끈을 놓으려하지 않는다. 자기만이 큰 일을 해낼 수 있다고 맹신한다. 자기 반성은커녕 자신만이 옳다고 생각한다. 잘못되는 것은 남의 탓 때문이라고 여긴다.

말을 자주 바꾸면서도 부끄러워 할 줄 모른다. 남의 얘기는 들으려하지 않고 입바른 소리, 쓴 소리 하는 사람은 곁에 오지 못하게 한다. 결국 그 주변에는 듣기 좋은 말만 하는 사람들이 모여든다. 노회(老獪)하고 단수가 높기 때문에 속내를 쉽게 드러내지 않는다. 속은 권력욕으로 차있어도 겉포장은 그럴듯한 명분으로 감싼다. 그 명분은 무슨 ‘개혁’일 수도 있고 무슨 ‘정의’일 수도 있다.

그러나 17세기 도의(道義)정치를 표방했던 조선의 선비들이 권력욕을 예(禮)로 분칠해 정치의 명분으로 내세우다가 나라를 쇠락의 길로 몰고 갔듯이, 권력욕에 이용된 명분은 곧 그 명분의 권위를 상실하기 마련이다.

산 자를 위한 장례식이 아무리 유행한다 해도 정치인 중에는 아마 이런 장례식을 치를 사람이 있을 것 같지 않다.

어떤 권력도 언젠가는 죽는다. 안타까운 것은 아무리 죽음이 가까이 와 있어도 그것을 눈치 채지 못하는 게 권력이라는 점이다. 언젠가는 닥쳐올 죽음을 생각할 줄 안다면 훨씬 겸손해질 수 있겠지만 권력의 속성은 그렇지 못하다. 권력이든 정권이든 살아있을 때 장례식을 치러 볼 정도로 여유가 있다면, 그래서 지금 자신들이 무엇을 잘못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면 그 끝은 아름답게 장식될 것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독재자라는 소리를 듣는 정치인도 있을 리 없다.

euhk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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