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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시인 고정희,젊은 페미니스트 통해 부활하다

입력 | 2001-06-11 18:40:00

'소녀들의 페미니즘'멤버의 랩송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

1991년 지리산에서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난 고정희(1948∼1991·사진) 시인은 우리 곁에 큰 여백을 남겼다. 그로부터 10년 뒤, 앳된 소녀들이 고인의 여백을 차지하고 나섰다. 20세를 전후한 12명의 여성으로 구성된 단체 ‘소녀들의 페미니즘’이 그들이다.

이들이 처음 공개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8일 이화여대에서 열린 고인의 10주기 추모 심포지엄 행사장이었다. 이들은 검은 유니폼을 입고 이날 행사를 주최한 단체 ‘또 하나의 문화’ 회원들을 도와 행사 진행을 거들었다.

수다가 가득한 축제 분위기로 진행된 이날 심포지엄 막간에는 추모 공연도 선보였다. 고인의 작품에 ‘소녀들의 페미니즘’이 직접 곡을 붙인 ‘하늘에 쓰네’와 여성차별 사회를 꼬집는 랩송을 불렀다.

이들을 보고 소설가 박완서씨, 조한혜정 교수(연세대), 조형 교수(이화여대), 시인 김승희 김혜순 등 100여명의 참석자들은 즐거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이들의 진짜 무대는 이날 저녁 서울 영등포 서울시립청소년직업센터(하자센터)에서 열린 고인의 추모제 ‘상어떼 춤추는 바다로 가네’였다. 이들은 고인의 작품과 페미니즘을 소재로 한 밴드 연주와 랩, 춤을 선보였다.

전날 이들은 고인의 유품 전시회를 개최하고, 고인을 사이버스페이스에서 부활시킨 페미니스트 마당 ‘고정희넷’(www.gohjunghee.net)을 띄우기도 했다.

이들이 고정희 시인을 스승으로 삼은 것은 석달전이었다. 조한혜정 교수가 ‘하자센터’를 들락거리던 이들에게 고인의 10주기 행사 기획을 맡긴 것이 시초가 됐다. 이들은 제도권 교육에서 벗어난 아이들을 모이는 하자센터, 탈학교학생모임 ‘민들레’ 등에 속한 15∼21세 소녀들이다.

김희옥 하자센터 꼴레지오 교장은 “이들은 지난 석달간 스스로 자료를 모으고, 여덟차례 워크샵을 가지면서 고인의 시와 삶을 열심히 공부했다”고 설명했다.

이들은 스스로를 ‘고정희와 열두 제자들’이라 부를 만큼 자부심이 대단하다. 이들은 하자센터측에 중고생을 위한 페미니즘 소녀학교를 만들도록 압력(?)을 행사하는 한편, 방학때 페미니즘 캠프를 열면서 ‘잠을 자면서도 페미니즘 공화국을 꿈꿨다던’ 고정희 시인의 업을 잇겠다는 당찬 각오를 보였다.

digan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