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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포럼]조재영/통·번역사 '중간평가' 하자

입력 | 2001-04-12 18:58:00


이제 태평양은 예전 만큼 엄청나게 크고 넓은 대양으로 인식되지 않는다. 뉴욕과 런던을 아득하게 멀리 떨어진 도시로 여기는 사람도 없다. 경제적 여유만 있다면 쉽게 갈 수 있는 곳이 되었다. 20세기 후반부의 교통수단과 기술의 엄청난 발전이 초래한 현상이다.

인류는 1969년 7월 아폴로 11호 우주선 선장 닐 암스트롱이 달 표면을 껑충껑충 뛰어다니는 모습을 보았다. 달 표면에 선 암스트롱의 시야에 들어온 지구는 음반의 약 8배 정도 크기였다고 한다. 그때부터 지구는 지구촌이라고 불려졌다.

그러나 지구촌 시대가 됐어도 이웃나라 일본은 대다수 한국인들에게는 그렇게 가깝게 느껴지지 않는다. 반면에 지뢰와 철조망으로 겹겹이 차단해 놓은 한반도 남쪽과 북쪽 사람들의 머리 속에는 남과 북이 그리 멀게 느껴지지 않는다. 왜 그럴까? 통역과 번역을 가르치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한국과 일본은 통역과 번역의 대상관계이고, 남북은 통역과 번역의 대상관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두 집단은 맹렬한 싸움을 하다가도 적당한 시간이 지나면 화해가 된다. 그러나 언어가 다른 집단이 갈등을 빚으면 오래 가기 마련이다.

▼부단한 훈련-지식연마 요구▼

모든 일본인이 한국어를 할 줄 알고, 모든 한국인이 일본어를 할 줄 안다면 아마 오늘날처럼 서로 상반되는 주장을 계속 하지는 않을 것이다. 의사소통이 원만하게 이뤄지면 상반된 인식내용이 조정 협상 타협될 수 있기 때문이다. 검은색과 흰색은 고체형태로 만나면 그대로지만, 액체로 만나면 섞여서 회색이 된다. 통역과 번역은 이런 기능을 하는 것이다. 통역사와 번역사는 언어가 다른 두 개인 또는 집단의 인식 내용이 조정되고 협상돼 타협에 이르도록 해주는 사람들이다.

언어가 달라 나타나는 오해를 풀어주고, 편견과 선입관을 해소해 주고, 적대감과 의심을 없애주는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다. 사람과 사람, 집단과 집단이 조화롭게 살 수 있는 길을 터주는 이들이 통역과 번역을 하는 사람들이다. 말만 옮겨주는 말쟁이 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인류 역사에서 통역과 번역을 빼놓고 생각해 보자. 전쟁은 더 빈번히 일어났을 것이며, 과학지식과 문명은 지금처럼 널리 보급되지 않았을 것이다. 예수의 사랑의 복음과 부다의 자비정신이 이렇게 널리 알려질 수 있었을까? 남녀평등은 오늘날처럼 될 수 있었을까? 민주주의는 이처럼 널리 퍼질 수 있었을까? 환경보존의 중요성은 오늘처럼 강조될 수 있었을까?

동시통역은 어렵지만 번역은 두 언어를 웬만큼 알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이해가 부족한 탓이다. 신뢰할 수 있는 통역과 번역은 상당 기간 전문교육기관에서 교육받고 고된 수련을 쌓지 않으면 안된다.

원문의 내용을 왜곡하지 않고 상대방 언어로 정확하게 전달하는 일은 생각처럼 쉽지 않다. 번역과 통역은 말만 잘해서 되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관련된 두 언어를 자유롭게 모국어처럼 구사할 수 있어야 함은 물론이고 글이나 말에 담겨 있는 전달내용을 한치의 오차 없이 파악해야 한다. 이런 내용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기술도 구비돼야 한다. 의사들이 혈압 증후군을 토론하는 자리에서 상대국 말만 안다고 해서 통역과 번역이 가능할까? 그렇게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 아닐 수가 없다. 언어는 생각과 정서가 담겨 있는 그릇이기 때문이다. 번역과 통역은 말로만 되는 것이 아니고 관련 주제에 대한 지식이 갖춰지지 않고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언어는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에 따라 천차만별로 달라진다. 언어는 계층에 따라 다르고 나이나 성별과 직업에 따라서도 다르다. 이런 점을 감안할 때 통역사와 번역사는 부지런히 기량을 닦지 않으면 안되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다.

▼능력 계속 검증할 필요▼

이처럼 부단한 훈련과 지식 연마가 요구되는 직업에서는 한번 주어진 자격증이 죽을 때까지 유효한 제도는 바람직하지 않다. 번역사와 통역사도 능력을 계속 다시 점검하는 검증제가 우리나라에도 도입돼야 한다. 캐나다와 같은 번역 선진국에서는 번역사 자격을 몇 가지 급수별로 나누고, 끊임없이 하급 급수에서 상급 급수로 올라가도록 격려하고 있고 이에 따른 교육도 다양하게 실시하고 있다. 우리나라에도 자격검증 제도가 도입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격을 검증할 수 있는 기관은 엄격히 선정돼야 할 뿐 아니라 선정된 기관은 최선을 다해 책임 있는 검증을 해야 할 것이다.

조재영(한국외국어대 통역번역대학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