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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병상의 큰 할아버지 '미당 서정주'

입력 | 2000-11-05 19:00:00

▲미당과 김정안기자


동아일보 김정안기자는 미당 서정주(未堂 徐廷柱)시인을 ‘큰 할아버지’라 부른다. 김기자의 할머니가 미당의 동생이기 때문. 김기자는 입원 중인 미당의 말벗이 되기도 하면서 20대의 감성으로 노시인을 바라 보았다.

할머니의 오빠, 나의 또 다른 이름인 ‘지희’를 작명해 주신 분, 그리고 내가 끝까지 외울수 있는 유일한 시 ‘국화옆에서’의 미당.

지금까지 내가 갖고 있는 ‘큰할아버지’에 대한 기억 전부다. 얼마전부터 떠들썩하게 들려오는 할아버지의 출국 소식에도 나는 아쉬었을 뿐 슬프지 않았다. 그분을 그리워하기엔 나는 너무도 할아버지와 동떨어져 살아왔다. 그리고 들려온 미당의 입원 소식. 갑자기 뵙고 싶다는 아니 꼭 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화창한 화요일 오후. 날 못 알아보시면 어떡하나. 병실문 앞에서 나는 또 한번 망설이고 있다.

“저어 아버님, 상리 누이동생 손녀 정안이가 왔어요.”

내가 숙모라 부르는 미당의 큰 며느님이 내 소개를 해 주신다. 미당이 몸 담아 문화부장과 사회부장을 지내신 신문사에서 내가 일하게 됐다는 것도.

“허어.” 자그마한 그러나 또렷한 저음. 웃음 소리였을까. 이어지는 그 분의 미소. 침대옆 긴 소파에 앉은 내쪽을 향해 비스듬히 누워계신다. 침묵. 나를 말없이 응시하시는 그분의 눈길이 조금은 쑥스럽고 두렵기까지 하다.

이윽고 여윈 손가락으로 천천히 내가 쥐고 있던 음료수 캔을 가리키신다. 옆에 계신 그 분의 제자 한분이 “마시라고 그러시는 거세요”라고 귀띔한다. 다시 이어지는 그분의 침묵. 벽쪽을 보고 계시지만 눈 빛은 머언 곳을 응시하시는 것 같다.

“무슨 생각하세요, 뭘 보세요?”

“벽이 희어. 희다.”

이윽고 옆에 계신 제자에게 날 가리키며 말씀하신다.

“쟤 얼굴이 둥그러니 차암 좋다.”

갸름, 섹시. 요즘 내가 듣고 싶어했던 단어들…. 그 말들이 가루가 되어 너무나 기분좋게 산산히 부서진다. 용기를 내 그분께 다가가 손을 잡아드렸다. 주름지고 야윈 손. 그 분이 내 빰을 어루만져 주신다.

“바를 정(正)에 눈 안(眼)…. 바른 눈으로 세상을 봐야 해.”

내 이름을 기억하시는구나.

화요일 저녁, 6층으로 병실을 옮기셨다. 창 밖 너머로 인근 야산과 하늘이 보이지만 흐린 수요일 하늘은 잿빛이다.

“할아버지 저 또 왔어요.”

환하게 웃으시며 반기는 모습이 어제 보다 좋아보인다. 아직 점심 때인데 죽도 벌써 세 번이나 드셨다고 숙모님은 흐뭇해 하셨다. ‘할아버지를 조금 더 많이 보고 얘기 나누고 싶다.’ 얄팍한 내 욕심이 천장을 조용히 응시하시는 그분의 침묵을 깬다. 또 한번 경망스러워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할아버지 저 이제 기자로 일하며 살게 됐어요. 그런데 어떻게 하면 잘 사는 거예요?”

그 분이 천천히 그러나 매우 또렷한 목소리로 내눈을 응시하면서 말씀하신다.

“건강하고 진실하게 살아, 건강하고 진실하게 살면 돼.”

지금 이 순간 ‘건강하고 진실하게’ 살고 있는가. 날 위로하시려는 것이었을까.

“넌 잘할 수 있을 꺼야, 괜찮을 꺼야.”

“할아버지 오늘은 날씨가 흐려 하늘이 잿빛이예요”

“하늘이? 하늘은 푸르러야 해.”

“아, 할아버지의 그 시가 생각나요.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그리운 사람을 그리워 하자.”

그러나 나는 곧 침묵할 수밖에 없다. ‘푸르른 날’을 다 외우지 못하기 때문이다. 노시인은 달랐다. ‘푸르른 날’을 단 한소절도 빠뜨리지 않고 읊기 시작하신다. 그 특유한 저음으로 아주 천천히, 천장을 응시하시면서.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다. 사람도 잘 몰라보고 기억도 혼미하시다고들 하셨는데….

“저기 저기 저, 가을 꽃 자리/초록이 지처 단풍 드는 데/눈이 나리면 어이 하리야/봄이 또 오면 어이 하리야/내가 죽고서 네가 산다면?/네가 죽고서 내가 산다면!/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그리운 사람을 그리워 하자.”

갑자기 가슴이 메어올 뿐, ‘그리운 사람’이 누군지 감히 묻지 못했다. 대신 그분의 손을 꼭 잡아드렸다.

“오늘 하늘은 잿빛이지만 단풍은 참 고와요. 날씨도 포근하구요.”

“단풍은 내장산이 좋아. 선운사도 괜찮고.”

“할아버지 빨리 나으셔서 저랑 내장산 단풍 보러가요. 약속해요.”

“그래, 가자.”

할아버지께 또 물었다. 문인 중 누굴 가장 존경하느냐고, 누구를 가장 ‘괜찮게’ 보시느냐고.

“누가 가장 괜찮냐고? 그야 바로 나지.”

너무나 여위고 허약해지신 모습. 그러나 시에 대한 열정과 자신감이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강인함으로 다가온다.

밤 늦게 할아버지의 사당동 집 서재를 찾아갔다. 어두컴컴한 백열등, 은은한 향 냄새, 사방이 책으로 쌓여있는 그 곳. 할아버지가 집필하시던 그 의자에 살며시 앉아 보았다.

사당 집을 지키고 계시던 그분의 동생, 작은 할아버지가 형에 대한 기억을 더듬으신다.

“한때는 형과 인연을 끊을까도 생각했었지. 네 큰할아버지의 그늘에 항상 가려져 있는 게 싫었으니까. 나이 오십을 넘으면서 달라지더라. 그 분의 깊은 속을 좀 이해하게 된거지”.

미당 할아버지는 칭찬에 인색하신 분이었다고 했다. ‘괴팍하다‘는 소리도 들었다고 했다. 그러나 아버지 얘기만 나오면 젊은 시절 효도하지 못했다며 눈물을 훔치던 아들, 어린 조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그 ‘애비’인 동생에게 장문의 편지를 보내 위로하던 따뜻한 형으로 그분은 미당을 기억하고 있다.

이제 곧 겨울이다. 내년엔 할아버지의 손을 잡고 꼭 내장산 단풍구경을 가야 겠다.

김정안기자 cred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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