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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밀레니엄]포드社의 분업체제 혁명

입력 | 1999-09-01 18:34:00


높은 굴뚝에서 솟아오르는 연기와 쉴새없이 돌아가는 컨베이어벨트. 미국 미시간주 디어본에 있는 포드루지공장은 20세기 산업을 상징하는 하나의 거대한 ‘도시’다. 디트로이트 강가 250만평에 자리잡은 이 공장의 건물들은 철로와 컨베이어벨트로 연결돼 있으며 자동차조립공장은 물론, 철강 유리공장 부두 발전소까지 갖추고 있다.

“1920년대에는 자동차생산에 필요한 모든 것을 갖춘 세계 최대의 복합공장이었다”는 것이 홍보 담당자의 설명. 지금도 포드 무스탕이 2초에 한대씩 생산되며 북미지역에 있는 포드사의 자동차조립공장 20개중 16곳에 엔진과 부품을 공급한다.

‘자동차 도시’ 디트로이트 근방에는 루지공장을 비롯해 GM 포드 다임러크라이슬러등 세계 3대 자동차회사의 센터와 각종 부품공장들이 터잡고 있다. 3대 자동차메이커들은 1년에 약 3000만대의 자동차를 생산해 2000억달러(약 240조원·99년 한국 정부예산은 86조원 정도)를 벌어들이고 있다.

세계 자동차 생산의 중심지라는 사실외에 이 곳 사람들은 ‘디트로이트야말로 20세기가 시작된 곳’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다. 컨베이어벨트가 처음 설치되고 대량생산 대량소비체제가 탄생한 곳이 바로 여기이기 때문이다.

‘자동차왕’ 헨리 포드가 분업의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 컨베이어벨트를 착안한 것은 순전히 행운이었다. 사실 분업의 효과에 대해서는 아담 스미스 때부터 알려져 있었다. 여러 공장에서 소규모 분업이 이뤄지고 있었고 주물공장이나 제분소에서는 재료를 나르는데 컨베이어벨트를 이용하고 있었다. 아이디어는 어디에나 떠다니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을 자동차처럼 복잡한 기계에 적용한다는 생각은 아무도 하지 못했다.

두번이나 자동차회사를 차렸다가 실패한 포드와 그의 직원 윌리엄 클랜은 1907년 우연히 시카고의 한 가축 도살장에 들렀다. 그 곳에서는 인부들의 머리 위에 설치된 이동활차를 통해 가축의 고기가 이동하고, 인부들은 가만히 서서 고기를 자르고 있었다. 정육 과정을 지켜보던 포드의 머릿속에는 빛이 번쩍했다. “저절로 움직이는 조립라인을 만들면 시간을 줄일 수 있겠다.”

포드는 도살장의 아이디어를 자동차공장에 실험했다. 먼저 엔진의 자석발전기 생산에 컨베이어벨트를 도입해보니 놀라운 결과가 나타났다. 1개에 18분 걸리던 제조시간이 5분으로 단축된 것이다.

이동하던 엔진이 떨어져 근로자의 다리를 부수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으나 포드사는 컨베이어벨트의 성능을 개선해 꾸준히 확대적용했다. 전체 공정에 컨베이어벨트를 도입한 결과 12시간반 걸리던 차대(車臺) 제작시간이 1시간반으로 줄었다. 1913년 디트로이트 북쪽의 하일랜드파크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보다 빨리 보다 싸게 보다 많은 물건을 생산할 수 있는 ‘대량생산’ 기법이 탄생한 것이다. 다른 자동차들이 2000달러를 호가할 때 포드사의 ‘모델T’ 값은 1925년 260달러에 팔렸다.

하지만 그러한 작업방식은 근로자들에게 커다란 충격이었다. 끊임없이 돌아가는 컨베이어벨트 속에서 인간은 하나의 기계부품으로 전락했다. 직공들이 신경쇠약이나 정신착란에 걸린다는 소문이 돌았고 결근과 중도탈락이 줄을 이었다. 1만4000명이 일하던 하일랜드파크 공장은 1년동안 그 5배의 근로자를 모집해야 했다.

노동자의 이탈을 막기 위해 고심하던 포드는 1914년 1월 중대한 결단을 했다. 하루 8시간 노동에 5달러(당시 평균일당은 2.34달러)를 주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신문에 대서특필된 이 소식을 듣고 캐나다 접경의 판자촌, 뉴잉글랜드의 농장, 텍사스의 목장등 미국 전역에서 수만명의 지원자가 몰려 들었다. 공장 앞에는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경찰과 소방차들이 출동했다.

두배나 오른 임금 덕분에 포드사의 노동자들도 포드자동차를 살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은 주말이면 가족과 함께 자동차를 몰고 교외로 나가 여가를 즐기는 최초의 ‘중산층’이었다. 극소수 부자와 귀족들의 오락품이던 자동차는 보통 사람들의 필수품이 되기 시작했다.

포드는 단지 노동자들을 붙잡아 두기 위해 임금을 올렸지만 그들은 새로운 소비자가 되어 판매에 날개를 달았다. ‘포드주의’라 불리는 대량생산 대량소비 체제가 최초로 완전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1927년 하일랜드파크 공장이 디어본의 루지로 옮겼을 때는 1500만대의 모델T가 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세계 전체 자동차의 절반이 포드사에서 만들어졌다. 포드의 생산방식은 다른 회사로, 다른 산업으로 전파되었고 자동차공업은 철강 고무 석유 도로건설등 수많은 연관 산업들을 발달시켰다. 미국은 이러한 생산혁명을 바탕으로 산업혁명의 발원지인 영국을 제치고 20세기의 패자(覇者)가 되었으며 세계로 수출된 포디즘은 각국의 생활양식을 변화시켰다.

오늘날 대량생산과 대량소비에 의한 생활수준 향상 없이 ‘대중’과 ‘민주주의’를 상상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는 노동소외와 환경오염이라는 해결과제를 인류에게 안겼다.

〈디어본(미시간주)〓신연수기자〉ysshi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