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부의 수장(首長) 역할을 제대로 한 우리나라 역대 대법원장은 과연 몇명이나 될까. 가인 김병로(金炳魯·초대)선생과 조진만(趙鎭滿·3,4대)씨 정도가 아닐까. 이들은 이승만(李承晩)대통령과 박정희(朴正熙)대통령에 맞서 사법부를 지켜낸 일화가 많다. 그것이 가능했던 첫째 요인은 대통령과 대법원장이 서로 존중하는 관계였다는 점일 것이다. 그후 사법부는 많은 정치적 우여곡절을 겪으며 점점 ‘행정부의 시녀’로 전락해 왔다는 가혹한 평가를 받기도 한다.
법관들은 70년대 초반, 80년대 후반, 90년대 초반 등 몇차례의 사법파동 과정에서 사법부 독립의지를 강하게 표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법부 독립은 제자리걸음을 하거나 오히려 퇴보한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마저 든다. 참으로 역설적 상황이 아닐 수 없다. 올들어 터진 대전법조비리사건과 관련해서도 검찰의 정치적 중립 논란과 함께 사법부 독립의 목소리가 다시 불거져 나왔다. 그러나 이제 다시 먼 옛날얘기로 되돌아간듯한 인상이다.
대법원장은 사법부 독립의 상징이다. 아니 상징에 그치지 않는다. 현실적으로 사법부의 큰 기둥이며 외풍을 막아내는 방패여야 한다. 그런데 대부분의 대법원장들이 왜 그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던 것일까. 사법부를 포함한 법조계 전체의 신망과 존경을 받는 인물이 대법원장으로 임명된 경우가 드물었던 탓이 아닐까. 정권의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하향식으로 임명돼 왔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면 대법원장다운 대법원장을 탄생시키려면 어떻게 해야할 것인가. 사법부 개혁의 핵심중 핵심은 바로 여기에 있다고 본다. 때마침 현 윤관 대법원장의 임기가 오는 9월 만료된다. 이를 계기로 법조인들 사이에 대법원장의 임명방식에 관한 논의가 한창이다. 특히 변호사들의 전국단체인 대한변협(회장 김창국·金昌國)은 ‘대법원장추천위원회’를 구성했다. 위원장에 추대된 이일규(李一珪)전대법원장을 포함해 14명의 변호사와 1명의 대학교수가 참가하고 있다. 이 위원회는 나름대로 공정하고 엄격한 심사와 투표를 통해 복수의 대법원장 후보를 선정, 대통령에게 추천할 예정이다. 대통령이 겸허하게 수용해야 이 방식은 열매를 맺을 수 있다.
법관들의 능력을 누구보다 잘 아는 집단이 바로 변호사들이다. 그런 관점에서 이 방안은 일단 설득력을 갖는다. 변호사들이 법정에서 변론활동을 하다보면 법관들의 능력과 인품 등이 자연스럽게 눈에 들어오기 마련이다. 사법부에 대한 변호사들의 영향력 증대, 그리고 대통령의 인사권 제한이란 측면에서 사법부와 청와대가 거북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미국 일본에서는 이런 방식이 이미 관행으로 정착돼 있다.
변협이 추천한 후보군에 끼지 못한 엉뚱한(?) 인사가 대법원장에 임명된다면 말썽이 되는 시대가 과연 올 것인가. 추천위원회 활동이 국민의 전폭적 신뢰를 얻게 되면 가능할 것이다. 그러자면 후보심사과정이 투명하고 공정해야 한다.
변협은 이런 상향식 대법원장후보 추천이 성과를 보게 되면 2단계로 일반법관들에 대한 평가카드도 만들 계획을 갖고 있다. 법관 개개인의 재판능력 판결성향 청렴성 등에 대해 광범위한 자료를 수집해 사법부의 인사자료로 활용토록 하겠다는 얘기다. 현재 전국의 개업변호사는 3천7백여명이다. 일부 사감(私感)이 개입될 수 있다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객관적 평가를 추출해 낼 수 있는 충분한 표본수라고 본다.
법관인사는 법관들만의 관심사항이 아니다. 검사와 변호사들도 자신들의 업무와 직접적 이해관계가 있기 때문에 관심을 갖는게 당연하다. 국민입장에서 보면 사법서비스의 질적 문제가 걸려있는 중대한 사안이다. 공정한 인사 없이 ‘법과 양심에 따른 독립된 재판’은 그림의 떡일 뿐이다. 그러나 인사권자인 대법원장 혼자 1천3백여명이나 되는 전국 법관들을 속속들이 알 수는 없다. 객관적인 검증 시스템도 없다. 그러니 사법연수원 졸업성적으로 매긴 서열이 현직 내내 인사의 중요기준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대법원장에 따라서는 개인적으로 친분 있는 변호사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도 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편파인사의 위험성이 도사리고 있다. 법관들에 대한 올바른 인사야말로 사법부 독립의 요체다.
육정수sooy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