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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민의 세상읽기]「모래위의 城」 국민연금

입력 | 1999-04-13 15:52:00


국민연금 파동은 연출자 없는 한 편의 드라마다. 아직 끝나지 않은 이 드라마는 정부와 국민의 문명적 윤리적 수준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보건복지부는 공공기금 관리기관의 도덕성과 능력에 대한 국민들의 총체적 불신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일을 벌였다. 뿐만 아니라 ‘사회적 연대’의 원칙에 따라 조직하는 사회보험의 근본취지를 홍보하고 사회적 합의를 마련하는 작업도 하지 않았다. 국민연금의 수익률은 가입자의 소득수준에 반비례한다. 고소득자일수록 많은 보험료를 내지만 사후에 받는 연금이 비례해서 많지는 않다. 이들의 손실은 적은 보험료를 내고 상대적으로 많은 연금을 받는 저소득자의 이익이 된다. ‘아름다운 연대’임에는 분명하다. 하지만 이것을 실현하려면 먼저 국민적 합의가 있어야 한다.

재정경제부 등 유관부처는 이 제도에 필요한 조세행정 인프라를 개선하려는 노력을 충분히 하지 않았다. 보험료를 소득에 비례해서 책정하는 제도를 만들면서도 자영업자의 소득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한 보완조처를 확실하게 제시하지 않은 것이다. 현재의 제도로는 자영업자들이 소득을 낮추어 신고하는 사태를 막을 수 없다. 근로소득세가 원천징수되기 때문에 소득을 감출 수 없는 유리지갑(봉급생활자)들이 크게 분개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다.

이런 사태는 정부가 국민연금 제도를 감당할 만한 실력을 아직은 갖추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동아일보가 9일 보도한 국민연금 가입 도시자영업자 설문조사 결과는 국민의 윤리적 수준 역시 정부의 수준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려준다. 이 조사에 따르면 신규 가입한 도시자영업자 열 가운데 여섯이 실제보다 훨씬 낮은 수준으로(평균 56%) 소득신고를 했으며 대부분 응답자(73%)가 남들 역시 소득을 속였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국민연금이 국민의 대다수를 거짓말쟁이로 만들고 사회적 불신풍조를 증폭시키고 있는 것이다.

국민연금 확대실시에 반대한 응답자들(61%)이 밝힌 이유도 흥미롭다. 정부와 연금관리자에 대한 불신과 모호한 소득산정 기준 등 납득할 수 있는 이유를 제시한 경우는 모두 합쳐 29.8%에 불과하다. 주요한 반대이유는 경제적 부담(43.9%)과 강제가입(17.5%)인데 이것은 노후보험인 국민연금의 취지를 이해하지 못한 데 따른 것이다. 민간 보험시장이 있는 데도 국가가 노후보험 가입을 강제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사람은 보통 미래의 필요를 현재의 필요보다 과소평가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장수(長壽)는 행운이다. 하지만 소득 없는 노후는 끔찍한 재앙이다.

모든 국민에게 최소한의 소득이 있는 노후를 보장하려면 비용이 들고 그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서는 가입자 모두가 현재의 경제적 부담을 감수해야 한다. 그리고 여기에 상대적 고소득자들이 상대적 저소득자를 지원하는 사회적 연대의 원리를 도입하려면 강제가입 규정은 필수적인 사항이다.

정부는 지금 모래 위에 성을 쌓고 있는지도 모른다. 8일 보건복지부가 발표한 도시지역 개업의사들의 국민연금 소득신고를 보라. 개업의사의 평균 월소득이 불과 2백84만원. 월 99만원 이하 신고자도 7%나 된다. 치과의사와 한의사도 별로 다르지 않았다. 고소득 전문직으로 손꼽히는 개업의사들마저 이렇게 ‘가난’하다면 국민연금 실시는 시기상조다. 이들이 부자인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염치 모르는 거짓말이 판치는 풍토에서 아름다운 사회적 연대가 꽃필 수는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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