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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이훈구/「정신적 공황」은 막아야 한다

입력 | 1998-03-14 20:56:00


청천벽력과 같은 국제통화기금(IMF)시대를 맞아 온 국민이 깊은 충격속에 빠져 있다. 실직한 가장이 아파트 옥상에서 투신자살하고 일가족이 극약을 먹고 집단 자살한다. 대량해고가 사회에 끼치는 충격파는 비단 경제적 궁핍만이 아니다. 오히려 경제적 곤란은 우리가 마음만 고쳐 먹으면 쉽게 인내할 수 있다. 우리는 6·25라는 혹독한 전쟁을 치렀고 보릿고개도 견뎌낸 강인한 민족이다.

▼ 실직자 가족 좌절의 늪에 ▼

IMF의 심각한 충격파는 바로 정신적 공황이다. 실직자들이 길거리를 방황하고 투신자살을 하는 이유는 그들이 분노하고 좌절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지금까지 자기 직업을 천직으로 생각해 왔고 직장에 헌신해 왔지만 하루 아침에 해고당한 것이다. 그 억울하고 답답한 심정을 그 누가 이해할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그들은 삶의 의욕을 잃고 술과 마약으로 혹은 도박으로 자신을 서서히 파괴하고 있는 것이다.

며칠전 모 TV에서 방영한 어떤 실직자의 삶은 충격 바로 그것이었다. 그는 온 식구를 처가에 보낸 채 ‘동가식서가숙(東家食西家宿)’하고 있었다. 더구나 놀라운 사실은 그가 지하철을 계속 바꿔 타면서 하루 해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실직은 가정파탄으로 이어지기 쉽다. 평소에 금실이 좋았던 부부라 할지라도 가장이 실직하면 부부간에 냉기가 돈다. 아내는 남편이 하루종일 구들장을 지고 누워 깊은 한숨만 내쉬는 것을 볼 때마다 스트레스를 받는다. 그에게 하루 세끼 밥상을 차려주어야 하는 것도 큰 고역이다. 그러다보니 실직한 당사자보다 부인이 먼저 정신과를 찾게 된다. 실직가정의 자녀도 예외는 아니다. 아버지가 직장을 잃으면 자녀들은 기가 꺾이고 성적도 떨어진다. 1930년대에 대공황을 겪었던 미국의 아동들은 장성한 후에도 다른 연령집단에 비해 자존심과 자신감이 계속 결여되어 있었고 대학수능점수도 부진했다. 실직한 아버지가 아내나 자녀에게 화풀이하는 가정폭력도 대공황기에 크게 증가했다. 이처럼 대량해고는 우리 가정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기 일쑤인데 그렇게 되는 원인은 실직한 아버지가 방황하고 부인이 흔들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부는 물론 민간인들은 실직가정을 돕는데 앞장서야 한다.

실직자에게 실업급여를 제공하고 직업훈련을 실시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그들의 가정와해를 막아주는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전국의 노동사무소 인력은행 그리고 직장에 상담소를 설치해야 한다. 지역사회의 민간단체들도 실직가정에 구원의 손길을 뻗어야 한다. 가능하면 심리학전문가를 동원해 실직가정을 방문하고 그들의 고충을 귀담아 들어야 한다.

정부는 실직자에게 재취업 교육을 대대적으로 실시할 예정인 바 재교육훈련비를 정부가 부담하고 재교육기관에 정부보조금이 지급될 예정이다. 실직자에게 새로운 기술을 가르치고 자격증을 따게 해주는 것은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기술교육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그들에게 적극적 사고와 자기효능감을 높여주는 정신교육이 뒤따라야 한다. 무엇보다 실직자는 이미 정신적으로 크게 위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감을 잃고 부정적인 사고를 하며 사회를 저주하고 있기 때문에 단순한 직능교육만으로는 취업문이 쉽게 열리지 않는다.

▼ 정신교육 프로그램 마련을 ▼

심리학자들이 IMF시대의 후유증을 크게 염려하는 이유는 한국인의 정신건강이 크게 악화할 것이라는 예상 때문이다. 만일 실직가정을 그대로 방치한다면 6백만∼8백만명의 한국인이 정신과적인 문제를 갖게 되는데 이들이 정신건강을 되찾으려면 수백억달러의 경비와 장기간의 세월이 소요된다. 그래서 최근 한국심리학회에서는 ‘심리학 자원봉사대’를 결성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여러 분야의 심리학자들이 핫라인을 설치하거나 노동사무소에 직접 나가 실직가정의 고민을 상담하고 아울러 재교육 프로그램에 적극 참가할 것이다.

이훈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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