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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秘話 문민정부 19]이건개에 돌아온 「사정칼날」

입력 | 1998-02-23 08:47:00


슬롯머신업계비리사건 수사가 계속되던 93년 5월19일. 그날은 문민사정의 칼날이 사정의 주체인 검찰을 향해 돌아선 날로 기록됐다. 서울지검 11층 특별조사실에 강력부 은진수(殷辰洙)검사가 슬롯머신업자 정덕진(鄭德珍)씨의 동생 덕일(德日)씨와 마주앉았다. 이건개(李健介·현 자민련의원)대전고검장과 정씨 형제의 커넥션을 확인하는 작업이 시작됐다. 덕일씨가 이고검장과의 관계를 털어놓으면서 수사는 순조롭게 진행됐다. “84년부터 이고검장과 고교동문인 방송기자 출신의 J씨를 통해 여러번 만났습니다. 88년쯤 서울 프라자호텔에서 단둘이 아침을 먹었는데 이고검장이 뜻밖의 부탁을 하더군요. ‘빌라를 매입하려는데 돈이 모자라니 빌려달라’는 겁니다. 그래서 세번에 걸쳐 5억4천2백만원을 빌려주었습니다.” 은검사〓이고검장이 돈을 갚았나요. 덕일씨〓현재까지 빌린 돈은커녕 이자도 받지 못했습니다. 돈을 빌려줄 때 이자나 상환조건 상환일 등은 전혀 거론하지 않았습니다. 은검사〓5억원을 순순히 빌려준 이유는 뭐죠. 덕일씨〓검찰이 호국청년연합회에 자금을 지원한다는 혐의로 형(정덕진)을 내사중이라는 소문이 나돌았어요. 당시 조직폭력 전담인 대검 형사2부장으로 있던 이고검장에게 형에 대한 수사를 하지 않거나 선처해달라는 뜻으로 준 것입니다. 그냥 달라고 해도 줄텐데 빌려달라고 해서 순순히 드린 것입니다. 덕일씨의 진술은 순식간에 검찰에 커다란 회오리를 몰고 왔다. 송종의(宋宗義·현 법제처장) 당시 서울지검장의 설명. “이고검장이 덕일씨에게서 돈을 받았다는 보고를 받고 하늘이 무너지는 느낌이었어요. 그러나 조서까지 받은 상황에서 달리 뾰족한 대책이 없었어요. 당시 검사들의 분위기를 볼 때 ‘없던 일로 하자’며 은폐할 경우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죠. 박종철(朴鍾喆)검찰총장에게 보고했더니 깜짝 놀라면서 한동안 말이 없었어요. 숨도 못쉬는 것 같았습니다.” 송지검장이 수사의 불가피성을 강조했지만 검찰 수뇌부는 가급적 이고검장의 수사를 피했으면 하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홍준표(洪準杓·현 한나라당의원)검사가 불구속 수사를 약속했던 덕일씨를 구속해 ‘입’을 막으려고 했다. 검찰 수뇌부와 수사팀 사이에 갈등이 증폭된 것은 물론이다. 사흘 뒤인 5월22일 홍검사는 동료검사에게서 뜻밖의 전화를 받았다. ▼ 『수사 막으면 옷벗는다』▼ “홍검사, 이고검장이 당신을 그냥 두지 않겠다고 펄펄 뛰고 있다고 합디다. 자신의 이름이 영문이니셜로 언론에 오르내리는 것이 홍검사의 작품으로 생각한다는 거예요. 명예훼손으로 고소할 것을 검토중이라는 얘기도 있어요.” 홍검사는 겁이 덜컥 났다. 이고검장이 일개 검사인 자신을 그렇게 생각한다면 검사생활은 끝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홍의원의 설명. “동료검사의 전화를 받고 난 뒤 솔직히 일이 손에 잡히지 않더군요. 그러나 명예훼손으로 고소당하거나 수사를 미적거려 대강 끝내거나 죽는 것은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내가 먼저 이고검장을 물기로 작정했죠.” 때마침 그날짜 한 석간신문 1면톱에 ‘고검장 1명 수뢰확인’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나왔다. 홍검사는 ‘검찰내에 이고검장의 수사를 바라는 사람이 있구나’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잠시 후 모 일간지 기자가 홍검사의 사무실 문을 빠끔히 열고 한마디 던졌다. “이고검장이 돈을 받았지요. 얼마예요.” “수억, 뇌물…” 그 무렵, 대검에서는 박종철총장 주재로 검찰 고위간부들이 참석한 가운데 이 고검장 문제에 대한 대책회의가 열렸다. 회의에서는 김태정(金泰政)대검 중수부장을 홍검사에게 ‘특사’로 보내 홍검사의 수사의지를 알아보자고 의견이 모아졌다. 곧 이어 서울 서소문 대검청사 근처 일식집. 연락을 받고 나온 홍검사가 김중수부장과 마주앉았다. 홍검사는 강경한 입장을 고수했다. “대검에서 계속 정덕일을 구속하라면 사표를 내겠습니다. 그리고 언론에 사표를 내게 된 이유를 설명하겠습니다. 이고검장은 거꾸로 나를 잡아넣으려 하고 있습니다. 앉아서 당할 수는 없습니다.” 한동안 말없이 듣고 있던 김중수부장은 “뜻을 충분히 알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5월22일은 검찰 수뇌부나 홍검사 이고검장 모두에게 숨가쁜 하루였다. 그날 저녁 한 조간신문 가판(지방판) 1면은 홍검사의 예상대로 ‘이고검장 억대 수뢰’라는 제목으로 장식됐다. 사태가 심상찮게 돌아가자 이고검장은 백방으로 뛰었다. 청와대 관계자를 만나기도 하고 전화로 구명운동도 벌였다. 당시 청와대 비서관의 설명. “이고검장은 구속되기 직전에 여러번 내게 전화를 걸어 도와달라고 했어요. 그래서 청와대 수석비서관에게 ‘구속까지 할 수 있느냐’며 구제를 부탁했어요. 별 반응이 없더군요. 김영삼(金泳三)대통령의 차남 현철(賢哲)씨에게도 이고검장 얘기를 했지만 마찬가지였어요.” 이에 대한 이의원의 설명. “솔직히 사람은 많이 만났지만 구명운동을 한 것은 아닙니다. 돈을 빌렸기 때문에 법률적 도적적으로 떳떳했습니다.” 홍검사의 고군분투(孤軍奮鬪)로 이고검장과 검찰 수뇌부의 구명노력은 좌절하고 말았다. 5월23일 집에 있던 홍검사에게 서울지검 간부가 대검의 고위간부 회의결과를 알려왔다. “홍검사, 당신이 이겼어. 이고검장 수사를 대검 중수부가 맡기로 결론났어. 내일부터 대검으로 출근해 수사를 지원하라는 지시야.” 이고검장이 대검에 소환된 것은 나흘 뒤인 27일 오후3시40분. 이고검장은 수사관들의 안내를 받아 곧바로 12층 황성진(黃性珍)중수부 2과장실로 직행했다. 응접탁자를 사이에 두고 두사람은 마주 앉았다. “고검장님, 몇가지 여쭤보겠습니다.” 이고검장은 덕일씨에게서 돈받은 사실은 순순히 시인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빌렸을 뿐 뇌물로 받은 것이 아니라는 주장을 거듭했다. 이고검장은 조사받는 도중에 김영수(金榮秀)청와대 민정수석에게 전화를 걸었다. “당신들, 죄도 안되는 것을 가지고 왜 이러는 거요. 끝까지 이러면 앞으로 정권타도 투쟁을 벌이겠소.” 잠자코 듣고 있던 김수석은 “심정을 이해한다”고 위로한 뒤 전화를 끊었다. 김수석은 곧바로 김대통령에게 올라갔다. “각하, 이고검장이 검찰에 기여한 공도 많은데 사법처리까지 하는 것은 가혹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김대통령은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당시 청와대 고위 관계자의 기억. “김대통령은 이고검장에 대해 이중적인 입장이었어요. 이고검장을 신뢰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김대통령은 검찰에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어요. 따라서 아무리 아끼는 이고검장이라도 쉽게 봐줄 수 없었을 겁니다.” 이고검장은 외부와의 전화통화에서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 『정권타도 투쟁 벌이겠소』 ▼ 절망감에 빠진 이고검장은 잘 알고 지내던 언론인에게 두차례 전화를 걸어 “구속수감되기 직전에 기자회견을 하겠다”는 뜻을 전했다. 뭔가를 폭로하겠다는 의도였다. 그러나 그는 구속되면서 그럴 기회를 갖지 못했다. 이고검장에 대한 수사 일화 한토막. 이고검장은 밤 12시반이 지나 조사가 끝나자 와이셔츠 차림으로 소파에 누워 잠이 들었다. 특별조사실과는 달리 중수부 과장의 사무실 창문에는 투신방지를 위한 쇠창살이 설치돼 있지 않았다. 황과장은 극심한 감정기복을 겪고 있는 이고검장이 딴 마음을 먹을까 봐 뜬눈으로 밤을 샜다. 황과장은 날이 밝자마자 중수부장과 총장에게 조사결과를 보고했다. 이고검장에 대한 구속지시는 오전 10시쯤 내려졌다. 자신의 구속이 임박했음을 직감한 이고검장은 최후의 저항을 했다.‘피의자 신문조서’가 작성되고 있는 동안 그는 탁자위에서 뭔가를 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내용은 아직까지 베일에 가려있다. 황과장이나 이의원이 모두 구체적인내용에대해 함구하고있기 때문이다. 이의원은 당시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할만한 증거가 있었다면 ‘폭로’했을 수도 있다는 취지로 얘기했다. “내가 갖고 있는 정보는 물증이 없었어요. 이런 상태에서 폭로하면 오히려 내가 반격당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92년 대선 당시 서울지검장이었던 이고검장은 김대통령의 당선에 나름대로 기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청와대 비서관으로 근무했던 민주계 핵심인사의 기억. “92년 당시 이고검장이 민자당 대표였던 김대통령을 자주 만난다는 소문이 있어 김기수(金基洙)수행실장에게 알아봤더니 두번 정도 만났다더군요. 이고검장이 92년 대선 때 김대통령을 위해 기여한 것은 사실일 겁니다.” 이에 대해 이의원은 “나는 어느 자리에 있건 열심히 일합니다. 92년 대선 때도 그랬죠”라는 말로 답변을 대신했다. 황과장의 간곡한 만류로 이고검장은 결국 혼자서 분을 삭이고 말았다. 그는 입술을 깨물며 메모지를 양복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에 대한 구속영장은 5월28일 오후5시20분 발부됐다. 그날은 불기 2537년 ‘부처님 오신날’이었다. 이고검장은 서울구치소로 가면서 “모든 것이 허무했다”고 그때의 심정을 얘기했다. 〈양기대·이수형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