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따사로운 햇살에 눈을 뜬다. 창문을 통해 들어온 햇살이 침대 머리를 비추고 있다. 그는 침대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간다. 벤치에 앉아 있어야 할 남자가 보이지 않는다. 그는 고개를 돌려 시계를 바라본다. 시계는 벌써 오후 1시를 가리키고 있다. 간밤에 마신 술 때문인지 머리가 지끈거린다. 그는 침실에서 나와 주방 쪽으로 걸어간다. 그리고 냉장고 문을 열고 스파클 식수를 꺼낸다. 그는 물을 마시며 거실쪽으로 간다. 이상할 정도로 주위가 조용하다. 옆집 부부의 싸우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그는 습관적으로 자동응답기의 재생 버튼을 누른다. 안녕하십니까? 여기는 ××전화국입니다. 귀하의 전화 요금이 연체되었으니 속히 납부하시기 바랍니다. 삐…. 나, 형구다. 네 승용차 팔렸다. 돈은 예금 계좌에 넣을게. 삐…. 어미다. 시간 나면 김치 가져다 먹어라. 내가 가져다주면 좋겠는데 요새 천식이 도져서…. 삐…. 과장님, 저 이주임입니다. 짐 안 가져가실 겁니까? 회사에서 짐 치우라고 난립니다. 전화 주십시오. 삐…. 여보세요? 여기 삼천리 가스 동부 대리점인데요. 가스 요금이 연체되었으니 속히 납부하시기 바랍니다. 삐…. 저 ××경찰서 권형삽니다. 조사할 게 있으니 유월 삼십일 열시까지 수사과로 출두해 주시기 바랍니다. 삐…. 나 황이야.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친구 돈까지 떼어먹을 수 있냐? 우리집 담보로 돈 빌린 거 너도 알지? 나 그거 날리면 거지다 거지! 그는 정지 버튼을 누른다. 발 밑에서 벌거벗은 여자가 웃으며 말한다. ―당신도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그는 광고지를 밟고 지나간다. 하지만 광고지는 계속해서 앞을 가로막는다. ―아름다운 욕심, 아름다운 도전, 아름다운 성공― 어딘가 낯익은 광고문이다. 그는 주방쪽으로 걸어가다가 말고 멈춰 선다. 탈진한 모습으로 사막 한가운데 서 있는 남자가 물병을 들고 소리친다. ―나는 소망한다. 한 방울의 물을― 그는 그 옆에 떨어져 있는 또 다른 광고지를 내려다본다. ―하늘을 나는 남자가 아름답다― 빨간 머플러를 목에 두른 조종사가 환하게 웃고 있다. 그는 그 광고지를 조심스럽게 집어든다.
어느날 나는 알지 못할 힘 같은 걸 느꼈다. 마치 오랫동안 땅 속에 숨어 있다가 기어나온 매미와 같은 힘이었다. 그렇다. 나 자신이 매미 같은 존재였다. 몇 주일을 살기 위해 수천일을 어둠 속에서 꿈틀거리는…. 나는 이제 어둠을 뚫고 나가 화려한 삶을 끝마치는 그날까지 마음껏 날며 소리지를 것이다.
그는 책을 내려놓고 창가로 다가간다. 벤치는 텅 비어 있다. 햇빛이 내리쬐는 벤치 옆에 몰골이 험한 개가 앉아 있다. 개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지나가던 청년이 개를 힐끗 쳐다본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던져준다. 그러나 개는 꼼짝도 않는다. 개의 주변으로 아이들이 몰려든다. 아이들은 개를 만져보기도 하고 꼬리를 잡아당겨 보기도 한다. 개는 그런 아이들이 귀찮게 느껴지는지 한 차례 컹 짖는다. 아이들이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선다. 개는 다시 먼 하늘을 쳐다보며 움직이지 않는다. 그는 한참 동안 거리를 내려다보고 있다가 블라인드를 내린다. 그리고 침실로 들어가 외출복으로 갈아입는다.
밖으로 나온 그는, 맑고 싱그러운 공기에 취한 듯 한동안 움직이지 않는다. 그는 파릇한 풀과 나뭇잎을 하나하나 들여다본다. 그리고는 가슴을 펴고 공기를 한껏 들이마신다. 어디서 매미 우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는 매미의 울음소리를 따라 시선을 옮긴다. 매미는 플라타너스 가지 사이에서 울고 있다. 그는 눈이 부신 듯 나뭇잎 사이를 올려다본다. 지나가던 경비원이 아는 척을 한다. 그동안 어디… 외국 출장이라도 다녀오셨나보죠? 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셨군요. 하도 안 보이시길래…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했죠. 경비원은 겸연쩍게 웃으며 걸음을 떼어놓는다.
그는 남자가 앉아 있던 벤치쪽으로 걸어간다. 몰골이 사나운 개가 꼬리를 흔들며 그를 올려다본다. 그는 개의 머리를 손으로 쓰다듬으며 벤치에 앉는다. 개는 계속 낑낑거리며 그의 주변을 맴돈다. 그는 개를 바라보던 시선을 거둬 푸른 하늘을 올려다본다. 누군가 아파트 창문을 열고 홑이불을 털고 있다. 하얀 천은 하늘로 날아오르는 새처럼 퍼덕인다. 그 아래층에서 젊은 여자가 유리창을 닦고 있다. 여자는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유리창에 물을 뿌린다. 호스에서 뿜어져 나온 물은 유리창을 타고 아래로 흘러내린다. 빨래를 널고 있는 남자가 보이는 것은 9층이다. 남자는 속옷 차림으로 간이 건조대에 빨래를 널고 있다. 검은 빨래가 바람에 날린다. 남자는 한참 동안 날리는 빨래와 씨름을 하고 있다. 그는 5층으로 시선을 옮긴다. 푸른색 블라인드가 보이는 창 안은 죽은 듯이 고요하다.
그는 한참 동안 그곳을 바라보고 있다가 고개를 돌린다. 그리고 매미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그러나 매미의 모습은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의 생각을 눈치챘는지 옆에 앉아 있던 개가 컹 짖는다. 그와 동시에 매미가 푸드득 날아간다. 매미는 검은 점을 남겨놓으며 하늘 저편으로 사라진다. 개는 매미가 사라진 하늘을 멀거니 바라보다가 다시 벤치 아래 웅크리고 앉는다. 저기 말이에요. 오백 오호 여자…. 중년 부인 두 명이 가로수 밑에 서서 수다를 떨고 있다. 누구요? 아, 그 있잖아요. 오층 여자 말이에요. 남편이 논다는…. 그런데요? 그 여자가 남편을 칼로 찔렀대요. 그래요? 잘은 모르겠는데 중태라지요. 아마…. 다른 남자한테 미쳐 돌아다니더니… 쯧쯧. 그리고 말이에요. 매일 이 벤치에 나와 앉아 있는 사람…. 김부장이라는 사람 말인가요? 그래요. 글쎄, 그 사람 병이 도져서 어젯밤 갑자기 죽었대요. 무슨 병으로요? 급성 폐렴이라나, 폐암이라나. 에이그, 그 좋던 직장 잃고, 재산 날리고, 여편네까지 도망치더니…. 사람 일 알 수 없는 거예요. 언제 어떻게 될지. 그리고 저 개 말이에요. 안경을 쓴 여자가 슬그머니 개를 가리킨다. 집도 없이 나돌아다니는 갠데… 매일 그 사람하고 붙어 있더니만…. 미친 개는 아니겠죠? 아니에요. 오갈 데가 없어서 그렇지 귀엽게 생겼잖아요. 하긴…. 뚱뚱한 여자가 그를 힐끗 쳐다보며 목소리를 낮춘다. 근데, 저 사람은 누구예요? 글쎄… 인물은 훤하니 잘 생겼는데…. 우리 아파트 사람은 아닌가보죠?
그는 낑낑거리는 소리에 눈을 돌린다. 개가 꼬리를 흔들며 그를 빤히 올려다본다. 그는 주머니를 뒤져 개에게 줄 무언가를 찾는다. 하지만 줄만한 게 없다. 그는 잠시 여기저기를 뒤적거리다가 바지 주머니에서 검은 약봉지를 꺼내든다. 그리고 개에게 던져주려다 말고 입속으로 중얼거린다.
“안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