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범근. 그는 우리에게 97년의 가장 자랑스러운 한국인이었다. 어찌 차범근뿐이랴. 눈앞에 보이는 영광이란 물위에 뜬 얼음과 같다. 그 영광의 얼음이 떠오르기 위해서는 더 많은 보이지 않는 얼음이 물밑에 잠겨 있게 마련이다. 월드컵축구팀으로 떠오른 ‘한국축구’는 물밑의 얼음이었다. 또 있다. 수면으로 떠오른 것은 ‘영광’이며 ‘환호’였지만 그 물밑에 도사린 것은 축구인으로서의 길고 긴 수련과 고통으로 깎아낸 나날, 자기를 버려야 했던 인고의 시간들이다. 1998년은 다만 새로 오는 한해가 아니다. 국가의 명운이 걸렸다고 해도 좋을 난관을 앞에 놓고 우리는 이 한해를 맞는다. 쓰디쓴 쓸개를 핥고 있어야 하는 인내와 긴축, 그런 괴로움 속에서 월드컵팀에 거는 국민의 기대는 단순한 축구에의 기대만은 아닐 것이다. 국민의 이 절통한 가슴을 쓸어내려 주고 이 바닥을 알 수 없는 패배감을 쓰다듬어 희망을 잃지 않게 해 줄 손길일지도 모른다. 축구가 갖는 국민적 응집력과 그 폭발적 힘은 결코 단순한 공차기가 아니다. 그래서인가. 축구처럼 그 국민성과 정서가 선연하게 묻어나는 스포츠도 없다. 그뿐이 아니다. 인간은 손을 사용하는 직립동물이다. 그런데도 축구는 이 손의 사용을 금지한다. 그 어느 스포츠보다도 축구는 인간의 조건을 구속한다. 손의 사용은 금지되고 발의 높이마저도 제한하며 ‘오프사이드’는 적이 뒤에 첩자를 박아놓는 작전마저 허락하지 않는다. 그리고 단순하다. 멀리 차고, 정확히 차고, 더 빨리 뛰어가서 차는…. 그 단순성 외에 축구에는 어떤 왕도도 없지 않은가. 바로 그 구속성과 룰의 단순함 속에 우리가 열광하는 축구의 진정한 모습이 담겨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하여 축구는 격렬하게 우리의 곁에 다가선다. 월드컵 본선진출은 말 그대로 쾌거였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본선의 그날을 기다리고 있다. 우리의 전사들이 늠름하게 맞설 프랑스월드컵을 바라보는 마음은, 그러나 기대와 기쁨만은 아니다. 월드컵 4회연속 출장의 쾌거와 2002년 월드컵의 개최국인 한국이지만 진정으로 한국인은 축구를 사랑하는 것일까. 제대로 된 전용구장이 몇 개인가. 그나마 경기가 열려도 축구장은 늘 텅 비어 있지 않은가. 어쩌면 우리는 이처럼 열악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월드컵 출장을 이뤄낸 선수들에게 오히려 경이의 눈길을 보내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우리에게 다가온 ‘98’의 의미는 절실하다. 축구만이 아니리라. 우리가 헤쳐나가야 할 경제난도 마찬가지다. 무슨 지름길이 있을 것인가. 겸손한 자기 성찰, 그것을 베이스캠프로 하는 정확한 목표설정과 그것을 향해 최선을 다하는 준비, 그것 뿐이 아닌가. We Shall Overcome(우리는 승리하리라). 70년대 미국 흑인인권운동의 한가운데에서 그처럼 많이 불려지곤 했던 노래를 불현듯 떠올리는 마음은 무엇인가. 노도같이 몰아치는 공격과 철벽의 수비에 깃들일 승리를 향해 이 노래를 부르며 한해를 맞는다. 월드컵 전사여. 그대들이 차는 것은 단순히 직경 22㎝의 둥근 축구공이 아니다. 우리가 당신들에게 거는 마음은 더욱 크고 둥근 우리들이 꿈이다. 그들에게 스포츠 정신 이외의 다른 무거움을 얹어 주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오늘 우리 국민이 느끼는 침울함까지를 담아 긴 센터링을 날려다오! 국가의 난관을 앞에 놓고 한마음으로 결속하는 우리의 마음을 담아 슛을 때려다오! 그렇게해서 오늘 우리가 다짐하는 이 결의까지를 실어 상대의 골네트를 갈라다오! 그대들이여, 월드컵 전사여. 우리가 이뤄내야 할 또다른 희망으로 솟아올라다오. 한수산(작가·세종대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