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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컵 한일전을 보고]이문열/「잘못된 열광」의 뒤끝

입력 | 1997-11-02 16:00:00


프랑스 월드컵 아시아지역 B조 예선이란 긴 명칭이 붙은 한일(韓日) 축구전이 끝났다. 보는 이에 따라 다르겠지만 어이없는 패배였다. 전반 초반의 거듭된 실점과 후반의 날카롭고 불같은 공격은 아울러 경기의 내용이 균형을 잃고 있음을 드러내 보였다. 하지만 더욱 균형을 잃은 것은 선수들의 정신이 아니었던가 싶다. 그들은 무패(無敗)의 승자이고 손님을 맞은 주인이었다. 그러나 경기 내내 승자의 여유도, 손님을 맞은 주인의 예절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이번 경기에 우리가 부여한 의미와 열광의 무게에 짓눌린 탓으로 짐작된다. 일본이 이번 경기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열광하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지면 그것으로 월드컵 본선 진출이 좌절되는 벼랑끝의 한판이었다. 거기다가 월드컵 진출은 그들이 그토록 많은 투자를 하고서도 아직 한번도 실현해 본 적이 없는 숙원중 하나이기도 하다. 그런 일본에 비해 한국의 의미부여는 처음부터 정상을 벗어나는 데가 있었다. 이미 본선 진출권을 확보한 상태지만 인위적인 승부조작은 않겠다―이 정도면 넉넉했다. 그런데 일본이니까 꼭 이겨야 한다던가 따위 감정적인 이유가 끼여들고 거기에 다시 연승의 오만이 곁들여져 집단 히스테리와도 같은 열광을 이끌어냈다. 어떤 방송은 며칠전부터 유선TV 축구 채널이 생겼나 싶을 정도로 법석을 떨었고, 당일은 이 나라의 모든 공중파TV 방송국이 동일한 내용의 경기를 중계방송하는 한심한 전파낭비를 했다. 시청률을 의식해야 하는 그들의 고충을 이해 못하는 바 아니나 아무래도 지나쳤다. 물론 이번 경기에 보여준 온당치 못한 의미부여와 열광은 우리 대중의 일본에 대한 피해의식이나 방향을 잘못잡은 보상심리에서 비롯되었을 수도 있다. 설령 그랬다 쳐도 진정으로 그 역할과 책임을 다하는 매스컴이라면 그런 의식의 파행을 바로잡아 주어야 했다. 그런데도 우리 매스컴은 오히려 그걸 부추긴 감이 있다. 이 며칠, 사람들은 마치 경기당일을 무슨 국민적인 사냥축제를 기다리듯했다. 일본축구를 가여운 사냥감 정도로 얕보며 그 사냥에서 가학적(加虐的)인 쾌감을 충족하려 했다. 선수들이나 임원진을 혼란시키기에 충분한 잘못된 의미부여와 열광이었다. 현대사회에서 스포츠가 가지는 의미는 크다. 더구나 월드컵은 올림픽에 버금가는 국제대회다. 하지만 그래도 그것들이 차지할 열광의 몫이 있다. 대중의 열광이 그 몫을 넘어서면 그것은 다름아닌 우민화(愚民化)의 시작이다. 하물며 본질을 벗어난 의미부여와 거기서 비롯된 비뚤어진 열광이랴. 의미와 열광의 낭비도 사회적 손실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진정으로 큰 의미를 부여하고 열정과 성의로 풀어가야할 일이 수없이 많다. 축구강국은 일쑤 외채(外債)강국이고 스포츠대국중에 정치소국(小國)이 많은 데는 바로 그런 의미와 열광의 낭비도 한 몫을 했다고 봐야 한다. 이문열 (작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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