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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보가 남긴것 ②]92년 대선자금 조달루트

입력 | 1997-05-01 19:54:00


92년 12월19일 새벽. 金泳三(김영삼)후보의 당선이 확정된 직후 민자당 선거대책위원회의 고위관계자는 무심코 『그래도 막판에 돈이 풀려 다행이었다』며 안도감을 표시했다. 긴장이 풀린 탓이었을까. 그는 이어 『선거 초 중반만 해도 돈이 없어 허덕허덕했다』면서 『막판에 뭉칫돈이 풀리는 걸 보니 「노통」(盧泰愚·노태우 전대통령)이 도와준 모양』이라고 혼자말처럼 덧붙였다. 金鍾泌(김종필)자민련 총재의 말처럼 김영삼후보가 「천문학적 규모」에 달하는 92년 대선자금을 누구로부터 어떻게 조달했는지를 알아보려는 시도는 「장님이 코끼리 다리 만지기」격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실마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막판에 뭉칫돈이 풀렸다』는 당시 민자당 고위 선거관계자가 무심코 뱉은 말도 실마리 중의 하나다. 다만 문제의 뭉칫돈이 꼭 노전대통령의 비자금에서 나온 돈이라는 확증은 없다. 오히려 주목할 대목은 국민회의 측에 「공조직 대선자금만 3천1백27억원」이라고 귀띔했다는 당시 민자당 경리부 대리 金載德(김재덕)씨의 진술과 국민회의 金景梓(김경재)의원이 제기한 「산업은행 대출금 대선자금 전용의혹」이다. 우선 김재덕씨가 당초 가지고 있던 대선지출자료의 수입항목에 「김영삼총재 6백억원, 정원식 선거대책위원장 40억원」이 분명히 기재돼 있었다는 게 국민회의 측 주장이다. 정원식위원장이 40억원을 냈다는 것은 제쳐 두더라도 「김영삼총재가 6백억원을 냈다」는 대목은 「鄭泰守(정태수)한보그룹총회장이 김총재에게 6백억원의 대선자금을 건넸다」는 그동안의 설(說)과 일치하는 액수다. 김경재의원이 한보청문회에서 제기한 「산업은행 대출금 대선자금 유입의혹」은 정총회장 6백억원 헌납설에 좀 더 분명한 정황증거를 제공해준다. 당시 산업은행의 李炯九(이형구)총재는 「요 주의(要 注意) 여신 보유업체」로 분류돼있던 한보에 약정기간을 「92년 12월17일」로 못박은 운영자금 1백50억원을 긴급대출해준다. 1백50억원중 50억원은 11월28일, 1백억원은 12월2일자로 대출됐다. 투표일(12월18일)을 불과 20일과 16일 앞둔 시점에서 투표일 하루 전날까지를 약정기한으로 한 거액대출이 이뤄진 것이다. 이형구총재는 정총회장이 대출금 1백50억원을 김영삼후보 진영에 전달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도 혹시 김후보가 대선에서 패배할 경우에 대비, 약정일을 투표일 전날인 12월17일로 했다는 게 김의원의 주장이다. 민자당 선거관계자의 말과 김재덕씨가 갖고 있었다는 대선지출자료의 수입항목, 그리고 산업은행 1백50억원 대출과정을 종합해보면 정총회장이 산업은행 대출금을 포함해 6백억원의 자금을 마련, 대선자금에 허덕이던 김후보 진영에 갖다 줬기 때문에 막판에 뭉칫돈이 풀린 것 아니냐는 추론이 가능해진다. 물론 고위선거관계자의 말처럼 노 전대통령이 막판에 뭉칫돈을 지원했을 가능성도 있다. 노 전대통령의 핵심측근이었던 安秉浩(안병호)전수방사령관은 작년 시사월간지와의 인터뷰에서 『1천4백억원이 노 전대통령으로부터 YS(김영삼대통령)에게 넘어갔다』고 증언한 적이 있다. 6천억원에서 1조5천억원까지 거론되는 전체 대선자금 규모에 비춰볼 때 선거 막판에 자금난의 숨통을 틔울 만한 액수는 그 정도 되지 않았겠느냐는 것이다. 여하튼 김영삼후보 진영이 사용한 대선자금의 주요 출처는 재벌과 노 전대통령의 비자금일 것이라는게 정치권의 한결같은 관측이다. 특히 재벌쪽 창구로 주목받는 사람은 김대통령과 오랜 교분을 가진 재벌그룹의 K회장. 여권과 정보기관 관계자의 증언은 이렇다. 『당시 김후보나 당에서는 관행에 따라 30대 재벌로부터 모두 1천억원 가량을 걷기로 하고 K회장에게 창구를 맡아 달라고 했다. K회장은 그러나 1천억원은 무리라며 6백억원을 모금해왔다』 이 증언에 따르면 30대 재벌기업이 각각 평균 20억원 가량의 대선자금을 헌납한 셈이다. 하지만 「노태우 비자금 사건」때 드러난 재벌기업들의 정치헌금 규모를 볼 때 1개 재벌 당 20억원은 「상식」과 어긋난다. 대선 때가 아닌데도 삼성 현대 LG 대우는 연평균 40억∼50억원의 헌금을 노 전대통령에게 갖다 줬었다. 김후보 진영이 K회장을 통한 재벌기업 공식모금 외에 별도의 재벌창구들을 가지고 있었다는 항간의 의혹을 뒷받침해주는 대목이다. 安永模(안영모)전동화은행장의 경우를 보면 알 수 있다. 김영삼정부 출범 초 사정바람에 휩쓸려 구속된 안 전행장의 95년10월 증언. 『92년 대선 직전 李龍萬(이용만)전재무장관의 요구에 따라 라이프주택 趙庭民(조정민)부회장으로부터 3억원을 받아 이 전장관을 통해 민자당에 건네 줬다. 나중에 이 전장관이 민자당에서 영수증을 받아 라이프 측에 갖다 줬다』 안 전행장의 이 증언에서 보듯 당시 김후보 진영은 「금융계의 황제」라고 알려진 李源祚(이원조)전의원, 이 전재무장관, 琴震鎬(금진호)전상공장관 등 은행라인을 동원, 시중은행장들이 거래기업에 대선자금을 할당하는 방식으로 거액을 조달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할당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동화은행이나 하나은행 대동은행은 기존 은행에 비해 20분의 1 또는 30분의 1밖에 안되는 규모가 아니냐』는 안 전행장의 부연설명은 동화은행이 라이프주택으로부터 받아 건넨 3억원은 「새발의 피」에 불과하다는 얘기나 다름없다. 재벌들이 여당에 정치자금을 제공하는 통로인 선관위 지정기탁금의 추세는 또 다른 각도에서 92년 당시 재벌자금의 흐름을 보여준다. 선거 전 해인 91년의 기탁금은 1백88억원이었다. 그러나 선거가 있던 92년의 기탁금 총액은 1백74억원으로 오히려 줄어든다. 김대통령 취임 후 지정기탁금이 줄어든 해는 사정한파가 한창이던 94년 뿐이었다. 이같은 지정기탁금 총액변화에 대해 여권의 한 관계자는 『선거 때는 기업들이 여러 비선을 통해 후보진영에 직접 정치자금을 제공하기 때문에 선관위를 통한 기탁금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여하튼 김후보는 당시 1백21회나 되는 전국 유세를 다니면서도 지방에서 잠을 자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헬기를 이용, 밤에는 반드시 서울로 돌아왔다. 사람을 만나 대선자금을 만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주로 하얏트호텔이나 신라호텔의 스위트룸을 이용했다. 재벌들은 김후보를 만난 뒤 옆 방에서 대기하고 있던 홍인길(홍인길)씨 등 김후보의 가신(家臣)에게 거액이 든 가방을 전해주고 나오는 게 대선 당시의 풍경이었다. 〈김창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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