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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차명 통장의 주인

Posted March. 21, 2009 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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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 정부 시절이던 1995년 10월 19일 박계동 당시 민주당 의원(현 국회 사무총장)은 국회에서 대()정부 질의를 통해 노태우 전 대통령의 비자금 의혹을 제기했다. 박 의원은 신한은행 서소문지점에 300억 원이 3개의 차명()계좌에 100억 원씩 나뉘어 예치된 것을 확인했다며 예금 잔고 조회표를 공개했다. 군사 쿠데타로 집권한 정치군인들이 천문학적인 치부()를 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이 구속되기에 이르렀다. 성공한 쿠데타 주역들에 대한 사법적 단죄()의 출발점은 군사반란이 아니라 바로 돈의 역습이었고, 금융기관 차명계좌가 도화선이었다.

차명계좌란 남의 이름을 빌리거나 도용하여 만든 금융거래 계좌를 말한다. 성실하게 사는 보통 사람들이 다른 사람 명의의 통장을 개설할 필요는 없다. 일부 부패한 정치인이나 공직자, 기업인들이 수뢰나 횡령으로 챙긴 검은 돈을 숨기려고 만드는 경우가 많다. 정대근 전 농협중앙회장과 김민석 민주당 최고위원의 수뢰 사건, 전남 해남읍사무소 7급 공무원의 복지급여 횡령 사건 때도 차명계좌가 어김없이 등장했다.

돈에 대한 욕심은 부자()나 형제 사이도 갈라놓을 수 있다. 돈의 이런 위력 때문인지 계좌에 이름만 빌려준 명의자와 실제 소유자 사이에 돈의 실제 주인을 둘러싼 다툼이 심심찮게 벌어진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친동생인 노재우 씨와, 박철언 전 정무장관은 어느 대학 무용과 교수와 법정 공방을 벌이고 있다. 대주주나 회사 비자금 계좌에 명의를 빌려준 임직원이 돈 욕심이 나서 사고를 치거나 협박을 하는 바람에 골머리를 앓은 기업도 있었다.

대법원은 그제 금융실명거래 및 비밀보장에 관한 법률의 취지에 따라 차명계좌에 들어있는 돈은 실제 소유자가 따로 있더라도 계좌 명의자의 것으로 봐야 한다는 판결을 내렸다. 아무리 실제 전주()라도 다른 사람 명의를 빌려 만든 계좌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기가 더 어려워졌다. 이 판결은 금융실명제()를 다져 우리 사회의 투명성을 높일 것으로 기대된다. 내 돈 떼일까봐 밤잠 설치는 사람이 늘어나고, 이참에 횡재하겠다고 안면 바꾸는 사람도 늘어날 듯하지만.

권 순 활 논설위원 shkw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