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망자 0명의 기적

　155명을 태우고 뉴욕을 이륙한 비행기가 새떼와 충돌해 엔진을 잃고 추락한다. 기장은 성공확률이 0에 가까운 비상착수(非常着水)를 선택하고 허드슨 강에 내려앉는다. 사망자는 0명. 2009년 1월 발생한 이 사건은 ‘허드슨 강의 기적’이라 불리지만 42년간 2만 시간을 비행한 기장의 노련함, 얼음물에 빠진 승객들을 24분 만에 전원 구조한 듬직한 구조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뉴질랜드 제2의 도시 크라이스트처치엔 2010년 9월 규모 7.1의 강진이 발생했는데 단 2명의 부상자만 나왔다. 같은 해 1월 아이티가 규모 7.0의 강진으로 22만 명을 잃은 것과 대조된다. 뉴질랜드 총리는 “기적”이라고 했는데 피해를 막은 건 엄격한 건축 기준이었다. 뉴질랜드는 1931년 규모 7.8의 강진으로 256명의 사망자가 나오자 강력한 내진 설계를 법제화했다.

　▷화재 참사를 막는 기본 요소는 화재 경보, 스프링클러와 방화벽, 그리고 소방관들의 신속 대응이다. 한글날 연휴 전날 밤 울산 남구 주상복합아파트 대형 화재도 기본기에 충실했기에 사망자가 한 명도 나오지 않았다. 건물 중간층에서 시작된 불길은 강풍을 타고 순식간에 33층짜리 건물 전면을 휘감았다. 하지만 화재경보기가 제때 울려 주민들이 빨리 대피할 수 있었고, 스프링클러가 작동했으며, ‘타는 냄새가 난다’는 신고를 받고 화재 초기에 출동한 소방관들이 불길 확산에 대처할 수 있었다.

　▷영국 런던의 24층 그렌펠 타워와 아랍에미리트(UAE) 두바이의 86층짜리 토치타워에 2017년 6월과 8월 잇달아 대형 화재가 발생했다. 발화 지점이 건물 중간층이었고 모두 잠든 새벽 시간대라는 점도 같았다. 하지만 토치타워엔 화재 경보가 울렸고, 경비원들이 집집마다 문을 두드렸다. 방화벽 구조로 돼 있어 불길이 쉽게 번지지 않았다. 2시간 반 만에 화재는 진압됐고 사망자는 없었다. 반면 공공임대 아파트인 그렌펠 타워엔 경보도 문을 두드리는 경비원도 방화벽도 없었다. 약 80명이 숨졌다.

　▷건물 외장재도 중요하다. 그렌펠 타워 참사 땐 가연성 외장재가 불쏘시개 역할을 했다. 울산 아파트의 외장재는 고층 주상복합 건물에 많이 쓰이는 알루미늄 복합 패널인데, 패널 사이에 소음 진동 등의 완충재로 들어간 수지가 불에 잘 타는 성질이 있어 외벽을 타고 불길이 빨리 번진 것으로 추정된다. 전국에 30층 이상 고층건물은 4792개다. 고가 사다리차도 23층 높이까지만 진압이 가능하며 도심에선 진입 공간을 확보하기도 어렵다. 불연성 건축자재를 쓰고 화재 경보 시스템과 스프링클러 및 방화벽 같은 건물 내 화재 대비 시스템 강화에 조금의 소홀함도 있어선 안된다. 연간 가장 많은 화재 사망자가 발생하는 겨울이 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