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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만에 다시 울린‘오키나와 할머니’ 외침

40년만에 다시 울린‘오키나와 할머니’ 외침

Posted July. 31, 2018 08:06   

Updated July. 31, 2018 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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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종군위안부였다.’

 1991년 8월 고 김학순 할머니(1924∼1997)가 이처럼 아픈 과거를 증언해 큰 반향을 불렀다. 하지만 이보다 앞서 1975년 10월 일본 오키나와(沖繩)에 배봉기 할머니(1914∼1991)가 있었다는 사실은 그리 알려지지 않았다. 1970년대에 야마타니 데쓰오(山谷哲夫·71·사진) 감독이 배 할머니를 인터뷰한 기록영화 ‘오키나와의 할머니’를 아는 사람은 더 드물다. 7일 이 영화가 일본 도쿄 시부야의 소형 극장에서 상영됐다.

 배 할머니가 원해서 과거를 드러낸 건 아니었다. 1944년부터 오키나와의 외딴섬 도카시키(渡嘉敷)에서 위안부 생활을 강요당하다가 종전을 맞았다.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1975년 불법체류로 강제추방 위기에 처하자 당국에 자신의 사연을 밝혔다. 특별영주 자격을 얻은 뒤 현지 신문에 가명으로 응한 인터뷰에서 그는 “전쟁터에서의 일이 부끄러워 고국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고 말했다.

 1978년 야마타니 감독이 찾아간 할머니는 사탕수수밭 한가운데 두 평도 안 되는 헛간 같은 집에서 홀로 살고 있었다. “어떤 여자가 일 별로 안 하고 돈 버는 곳에 가지 않겠느냐고 해서 속았다. 배를 탄 뒤에야 오키나와로 간다는 걸 들었다.” 할머니는 함께 간 조선 여성 6명과 함께 위안소에서 지내는 동안 ‘아키코’라고 불렸다. 병사들 중 가끔 팁이나 비누를 주는 사람은 있었어도 관리자로부터 돈을 받아본 적은 없었다.

 영화는 당시 도카시키섬의 위안소 흔적도 찾아갔다. 위안소 옆집에 살던 43세 아들은 “난 그때 8, 9세 때여서 무슨 의미인지 몰랐다. 훗날 그게 위안소였다는 걸 알고 나니, 그 누나들이 정말 안됐더라”고 말했다. 69세가 된 그의 어머니는 조선인 위안부 7명의 이름을 하나하나 꼽으며 그들이 “이런 게 아니었는데”라며 자주 울었다고 전했다. “식당 일 돕는 줄 알고 왔는데 이런 일이었다니, 정말 불쌍했다.”

 야마타니 감독이 이 영화를 찍던 1970년대는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관심을 갖기 전이었다. 피해자를 수소문하던 중 만난 최창규 전 건축가협회 회장(당시 59세)은 “일본의 제 또래 남성들이 진상을 알면서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입을 다물고 있어 심히 유감”이라며 자신이 보고 들은 위안소의 실상을 증언해줬다.

  ‘오키나와의 할머니’는 최소한의 편집만 된 다큐멘터리지만 7일 상영회는 58석 전석이 매진됐다. 관객 도야마 고이키(外山小粹·23) 씨는 “전쟁이 여성에게 어떻게 보이지 않는 폭력을 행사했고, 그 폭력이 전쟁이 끝난 뒤에도 어떻게 이어졌는지 알 수 있었다”고 말했다.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들고 있다는 도토리 다쿠야(都鳥拓也·35) 씨는 “이런 기록이 남아 있고 아직도 보러 오는 사람들이 있다는 게 놀랍다”며 “영화의 존재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일본의 젊은 세대들이 볼 수 있는 기회가 늘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서영아 sy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