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니 설국이 펼쳐졌다. 밤의 밑바닥이 하얗게 변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18991972)의 그리고 일본인에게 노벨문학상을 안겨준 소설 설국()의 첫대목이다. 인간 내면의 순수를 사랑을 통해 투명하게 비추었다고 평가받는 이 소설. 첫 페이지만 읽어도 설국이니 하얗게 변한 밤의 밑바닥 등의 표현에 등장하는 하얀 눈을 통해 순수한 인간심성을 그려내는 작가의 심미적 혜안을 느낀다.
그 소설의 무대이자 집필지인 유자와() 온천마을(니가타현 미나미우오누마군 유자와마치)에 당도한 것은 지난주 말, 소설의 첫대목처럼 깊은 밤이었다.
소설쓰던 70년전 여관 집필실 그대로
그러나 나의 설국 행 여로는 소설과 크게 달랐다. 버스로 오느라 국경의 긴 터널(우에쓰센 철도의 시미즈 터널9.7km)을 기차로 통과해 설국으로 진입하는 환상적 경험도 하지 못했고 낮 최고 17도까지 오르는 이상기온으로 하얗게 변한 밤의 밑바닥도 볼 수 없었다.
눈 내리는 날이 더 많다는 이곳에 그날은 소설과 달리 눈이 내리지 않았다. 원고의 첫 장이 쓰여진 때가 올해 칠순 맞으신 내 어머님 태어나신 해(1935년)이니 이런 차이가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를 일. 세상은 늘 변하니까.
그래도 다행스러운 것은 소설이 쓰여진 여관 다카한()이 70년 지난 지금도 제자리를 고수하고 이상난동에도 불구하고 주변의 산과 들이 눈 뒤집어쓴 채 변함없이 설국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물론 목조인 옛 여관은 객실 47개에 235명을 수용하는 콘크리트 양옥 호텔로 바뀐 지 오래고 원고지 칸 메우며 한겨울 추위 이겼을 화로 놓인 다다미방 객실은 호텔 1층의 기념관에 박제처럼 잘 전시돼 있었다.
흑백영화 설국 관광객위해 상영
오전 7시. 밤새 닫혔던 기념관이 문 여는 시간이다. 햇빛 쏟아지는 동향의 온천 탕에서 아침 온천욕을 마친 투숙객이 유카타(얇은 천의 여름 기모노)차림에 젖은 머리카락 그대로 기념관에 들어선다.
입구의 커튼 가린 휴게실에서는 DVD에 담긴 흑백 영화 설국이 빔 프로젝트로 상영되고 있다. 스무 평 정도의 전시장. 사진 등 유품이 전시돼 있다. 옛 목조여관의 외형 일부와 함께 보존된 집필 객실은 원래 위치 그대로 건물 모퉁이에 두었다. 그리고 창을 통 유리로 처리해 집필 당시처럼 방안에서 바깥이 훤히 보이도록 했다.
언덕 위의 이 호텔. 계단 위 입구에 내걸린 유키구니노야도 다카한( )이라고 쓰인 나무 간판만이 노벨문학상 수상작이 태어난 곳임을 알려준다. 기념관의 집필실로 들어선다. 1층이라고는 하나 유럽처럼 아래층(로비)을 포함시키지 않은 데다 호텔 자체가 언덕 위에 있는지라 그 높이는 3, 4층쯤에 해당된다.
온천 인근 스키장 곳곳 관광명소 탈바꿈
덕분에 집필실에 앉으면 언덕 아래 마을과 철도가 훤히 내려다보인다. 시종 작가를 대신해 이야기를 이끄는 소설의 주인공 시마무라가 게이샤(일본기생) 고마코의 여관방 손님맞이 나들이를 지켜보던 그 위치다.
온천여관에 묵으며 글쓰기를 즐겼다던 가와바타 야스나리. 그의 유자와 온천 행을 이끈 것은 눈이다. 눈 많은 우에쓰(혼슈 북부 동해안에 위치한 아키타 야마가타 니가타 세 현의 옛 지명) 지방에서도 니가타의 유자와는 도쿄에서 기차가 연결되는 깊은 계곡 안의 온천마을이다. 소설 모두의 표현 그대로 유자와 온천은 국경의 긴 터널(군마와 니가타 두 현의 경계를 이루는 산악을 통과)을 통해 도쿄와 연결되는 당시 조에쓰선 철도의 한 끝이자 설국의 수도였다.
그 소설 설국. 탈고된 지 반세기 훌쩍 흘러 이제는 흘러간 옛 노래가 된 지도 오래다. 그래도 제목만큼은 아직 이 계곡에서 찬란히 빛난다. 유자와 온천마을 계곡 주변의 산악에 들어선 명문 스키장들 덕분이다. 해발 10002000m의 험준한 산악 틈새 계곡에 자리 잡은 유자와 마치. 그 깊은 계곡은 알파인스키의 고향인 오스트리아 알프스(티롤 주)의 아를베르크 계곡을 그대로 빼어 닮았다.
상트안톤, 레흐, 상트크리스토프 같은 산악마을처럼 계곡을 통과하는 철도와 도로를 따라 차례로 들어선 유자와 마치의 산악 마을들. 이곳 역시 일본 스키의 발상지다. 이곳 스키장의 명성은 도쿄로부터 신칸센 열차가 운행(1시간 소요)되는 것만으로도 증명된다. 이 중 최고급을 자랑하는 가라유자와 스키장을 보자. 전용 신칸센 역(가라유자와)을 두고 산중턱의 스키베이스와 리조트호텔로 연결되는 전용 곤돌라를 운행한다. 스키어는 역에서 곤돌라를 타고 스키장과 호텔로 직행한다. 니가타 현에는 모두 85개 스키장이 있다.
조성하 summer@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