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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공사 마친 미륵사지 석탑

Posted June. 21, 2018 07:55   

Updated June. 21, 2018 0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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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원형을 도무지 알 수 없는 석탑의 꼭대기는 그대로 남겨뒀다. 그 대신 1400여 년의 시간을 견뎌온 부재(部材·탑의 재료)와 새롭게 석탑을 떠받칠 돌들이 함께 어우러지면서 신구의 조화를 이뤘다. 우리나라 최고(最古)이자 최대(最大)의 석탑인 전북 익산시 미륵사지 서쪽 석탑(국보 제11호)이 20년간의 보수공사를 끝내고, 20일 모습을 드러냈다.

○ 서동요 주인공 무왕의 염원 담은 석탑

 미륵사지 석탑은 ‘서동요’의 주인공이자 백제의 중흥기를 이끈 무왕 시대(600∼641)에 지어졌다. 3탑 3금당(金堂·부처를 모신 건물)의 가람배치로 이뤄진 미륵사의 서쪽에 있었는데, 석탑임에도 불구하고 목탑처럼 2800여 개의 석재를 짜 맞춘 형태로 이뤄진 독특한 조형미를 자랑한다. 2009년 보수 중에 심주석(心柱石·탑의 중심 기둥 돌) 내부에 있던 ‘사리장엄구’가 발견되면서 건립 연도가 639년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때 발견된 사리장엄구는 보물로 지정됐다.

 세월의 풍파와 함께 석탑도 크게 훼손됐다. 통일신라시대 때 지진으로 탑의 일부가 무너져 내렸다. 18세기 조선의 문인 강후진이 쓴 ‘와유록(臥遊錄)’에는 석탑이 7층까지 남아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1915년 일제는 미륵사지 석탑을 조사하며 긴급보수를 요하는 ‘갑(甲)’ 등급을 내린 뒤 석탑의 서측면을 콘크리트로 덧씌워 버렸다. 교과서 등에 실린 흉물스러운 미륵사지 석탑의 모습은 이때 만들어진 것이다.

○ 문화재 수리 역사의 이정표

 1998년 구조안전진단 결과 콘크리트가 노후화되고, 구조적으로 불안하다는 판단에 따라 해체·복원 작업이 시작됐다. 문제는 미륵사지의 원형을 알려주는 자료가 전혀 남아 있지 않다는 점이었다. 25m 높이의 9층으로 추정됐지만 6층까지만 실측 자료가 남아 있어 구체적인 추정이 불가능했다. 특히 1993년 한국 문화재 복원에서 가장 실패한 사례로 꼽히는 미륵사지 동측 석탑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다양한 공론화 과정을 거쳤다. 명확한 고증 없이 추정에 의해 9층으로 복원한 동측 석탑에 대해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은 “최악의 복원 사례이고, 다이너마이트로 폭파해 버리고 싶다는 사람도 있다”고 혹평했다.

 논의 끝에 형태를 확인할 수 있는 6층까지만 부분 복원하기로 결정했다. 원형을 최대한 유지한다는 원칙하에 남아있던 부재의 재사용률을 무려 81%까지 끌어 올렸다. 단일 문화재 보수 정비 가운데 최장기간인 20년에 걸쳐 수리가 진행됐다. 일제가 흉측스럽게 발라 놓은 콘크리트 185t을 치과용 드릴로 정밀하게 제거하는 데만 3년이 걸렸다.

 최신 문화재 복원 기술도 총동원했다. 해체한 부재를 바탕으로 재조립할 석탑의 설계를 위해 3D 스캐닝으로 2800여 개의 돌을 일일이 측정했다. 부서진 옛 돌과 새 돌 사이에 티타늄 0.33%를 접합하는 황금 비율을 개발하는 등 문화재 보수 관련 기술특허만 5개를 취득했다. 배병선 국립문화재연구소 건축문화재연구실장은 “미륵사지 석탑 복원 과정에서 얻은 문화재 복원 신기술을 캄보디아와 라오스 등에서 진행하는 문화재 공적개발원조(ODA)에 활용하는 등 한국 문화재계의 이정표를 세웠다”고 말했다.

 미륵사지 석탑은 외부 가설 구조물 철거와 주변 정비가 끝나는 올해 11월, 일반에 공개할 예정이다. 내년 3월 12일 준공한다. 639년(음력 1월 29일) 사리를 봉안한 후 정확히 1380년 만에 다시 제 모습을 찾는 것이다.


유원모 onemor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