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라 말로 할 수 없는 비극적 사고, 아니 사건일 것이다.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관광선 세월호 침몰 사건 말이다.
그날 나는 서울에서 사고를 접하고 견딜 수 없는 기분으로 TV 앞에 붙어 있었다. 며칠 후 도쿄로 돌아갔지만, 이후 이 사건이 일본에서 보도되지 않은 날이 없다. 한국과 연이 깊은 이웃의 한 사람으로서 나 또한 괴로운 나날이다.
다양한 영상이 전해지는 가운데 심하게 기우는 선실에서 주고받은 고교생들의 대화만큼 가슴 아픈 것은 없다. 배가 침몰하겠지. 우리 죽는 걸까. 무서워. 아빠, 엄마, 사랑해요.
신나는 수학여행이 일변해 비극의 도가니가 됐고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아이들의 미래가 사라져가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선내에서 움직이지 마세요라고 되풀이되는 방송. 고교생들의 대화는 침몰해 가는 배의 영상과 함께 한국의 비극으로 길게 후세에 전해질 것이다. 아니,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드러난 문제점은 끊임이 없을 정도로 중첩돼 있다. 배는 왜 옥상에 객실을 증설했는가. 중량 제한을 무시한 채 믿을 수 없는 만큼의 짐을 싣고도 왜 태연했는가. 항구의 담당관들이 이를 못 본 체한 것은 왜인가. 실린 화물은 왜 고정되지 않았는가.
선장은 왜 쉬면서 젊은 항해사에게 조종을 맡겼는가, 선장도 승무원도 왜 승객을 제대로 유도하지 않았는가. 선실에서 나오지 말라고 계속 방송한 것은 왜인가. 선장이 솔선해 도망가는 일이 도대체 있을 수 있는 법인가. 조난훈련은 하지 않았던가.
해양경찰 등의 구조는 왜 그토록 더딘가. 일본 등지의 구조 지원을 받아들이지 않은 건 옳은 일인가.
갖가지 의문은 내가 여기서 거론할 필요도 없이 한국에서 연일 자세히 제기되고 있다. 이제 와서 일본인이 상처에 소금을 치냐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도 지금 내 기분을 털어놓고서야 다음 얘기를 할 수 있을 것 같다. 희생자들에게 깊은 애도의 뜻을 표함과 동시에 한국이여, 이런 나라가 아니지 않느냐라고 진심으로 호소하고 싶다.
내가 처음 한국 땅을 밟은 1979년 이후 이 나라에는 슬픈 사건이 매우 많았다. 시민에게 군이 총구를 겨눈 광주 민주화운동. 북한의 테러에 당한 아웅산 사건과 대한항공 폭파 사고. 최근에는 초계함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 그때마다 이 나라 특유의 비극을 동정해 왔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다르다. 한 발의 포탄도 총알도 날아다니지 않았고 폭파 장치가 장착 된 것도 아니었다. 폭풍에 휩쓸린 것도, 장애물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백주에 이만큼의 귀중한 생명을 멀뚱멀뚱 눈을 뜬 채 빼앗겼다.
한국에는 징병제가 있다. 애국심의 강도에서는 일본을 압도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하지만 사람의 생명을 소중히 하는 것이 이 정도로 소홀히 다뤄지고 있었다니. 직업윤리가 이 정도로 희박했다니. 적은 자신 안에 있었던 게 아닌가. 유사시 한국은 정말 제대로 나라를, 아니 국민을 지킬 것인가.
요즘 일본에 혐한 분위기가 퍼져 있지만 그래도 여전히 한국에 친근감을 갖는 사람이 많다. 이번 사건은 그런 사람들을 적잖이 낙담시켰다. 한국이 이런 나라였나, 라고.
하지만 그런 것은 지금 누구보다 한국인들 스스로가 가장 통감하고 있을 것이다. 스스로를 삼류 국가였나라고 한탄하며 아이들의 목숨을 앗아간 기성사회의 죄를 묻고 있다. 한국에서 이 정도로 자신을 비난하는 모습은 본 적이 없다.
그렇다. 이 사건은 한국 사회의 현실을 근본적으로 재검토할 기회를 준 것이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스스로의 손으로 사회를 재건할 수밖에 없다. 잊혀진 것을 되찾아 새로 만들어내는 수밖에 없다.
3년 전, 동일본 대지진으로 절망한 일본에 한국인들은 뜨거운 성원을 보내주었다. 우리 는 지금 답례를 하고 싶다. 한국이여, 파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