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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장판 - 5만원짜리도 짝퉁 찾는 한국

Posted February. 05, 2013 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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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로 봐서는 소매점은 아닌 것 같고, 공급처와 판매처를 연결하는 사무실일 것 같네요. 10층이라고 돼있네요.

지난달 31일 서울 강남의 한 업무용 빌딩 앞에 미니밴 한 대가 섰다. 이동걸 소장을 비롯한 특허청의 상표권 특별사법경찰대 서울사무소 소속 수사관 4명이 밴에서 내렸다. 위조 명품을 파는 인터넷 쇼핑몰 사무실을 급습하는 참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내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여긴 9층까지밖에 없잖아? 이런.

제보를 받고 시작한 수사는 처음부터 난관에 부닥쳤다. 인터넷 사이트의 주소지 자체가 허위였다.

세계 유일 짝퉁 전담 경찰

루이뷔통, 샤넬, 구치, 프라다 가방, 지갑, 벨트, 시계.

제보자가 알려준 주소로 접속하면 위와 같은 문구 아래로 제법 그럴싸한 인터넷 쇼핑몰 사이트가 열린다. 화면 한쪽에는 일대일 상담창이 있고, 아래에는 콜센터 전화번호와 사업장 주소가 있다. SA급 루이뷔통 베르니 브레아 가방이 20만6000원, 당일 배송이라고 한다. SA란 스페셜(Special) A를 줄인 말로, 진품과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정교한 모조품이라는 뜻의 은어다.

자기들끼리 하는 말이고 의미 없는 얘기예요. 다 자기 제품이 SA급이라고 하지, A급이라든가 B급이라며 파는 사람은 없으니까요.

박정원(가명) 수사관이 그들의 주장과 달리 명품 전문가의 눈을 속일 수 있는 짝퉁은 없다며 웃었다. 경사 출신인 그는 2011년 특채에 응해 경찰에서 특허청으로 직장을 옮겼다. 다른 나라에서는 경찰이나 관세청에서 위조 상품을 단속한다. 독립된 전담 조직이 수사권을 갖고 위조 상품만 적발하는 나라는 한국이 유일하다.

상표권 특별사법경찰대 인력은 서울에서 일하는 9명을 포함해 총 25명이다. 이들은 지난해 302명을 입건하고 짝퉁 13만1599점을 압수했다. 정품으로 치면 240억 원이 넘는 물량이다. 가방이 압도적으로 많았고 아웃도어 의류, 신발, 액세서리, 안경, 시계, 지갑도 적지 않았다. 비아그라 같은 의약품, 메모리카드나 전기장판 같은 일상 생활용품도 있었다. 이 소장은 정가 5만 원짜리 상품도 짝퉁을 찾는 사람이 있다고 말했다.

날로 교묘해지는 제조판매 수법

세계 유일의 짝퉁 전담 경찰이 한국에 생긴 배경은 좀 부끄럽다. 국가 위상이나 경제 규모에 비해 위조 상품 유통량이 너무 많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자 정부는 2010년 9월 특허청에 사법경찰권을 부여했다. 국제 암시장 전문조사 사이트 하보스코프닷컴의 발표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으로 한국의 짝퉁 시장 규모는 약 17조 원으로 추정된다. 세계 10위다.

이런 거대한 지하경제는 만드는 사람도, 파는 사람도, 사는 사람도 죄의식이 옅기 때문에 생긴다. 제보자의 상당수는 짝퉁을 샀다가 품질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이다. 당연히 처음부터 위조품인 줄 알고 산다. 명품 브랜드의 신상품 카탈로그를 들고 일반 의류잡화 소매점에 가서 이 제품의 짝퉁을 구해 달라고 하는 고객들도 있다. 소매점 주인은 서울 명동이나 동대문 일대를 돌아다니며 위조 상품을 찾아주고 수고비를 받는다. 이러다 보니 소매점 주인을 검거해도 짝퉁 생태계의 상류를 추적하기란 어렵다.

단속이 강화되면서 위조 상품 제조자와 유통업자의 수법도 점점 교묘해져 최근에는 선주문, 후제작이 많다고 한다. 이런 제작 방식을 십분 활용해 몇 달간 비밀공장을 운영한 뒤 목표 수량을 채우면 장소를 옮기는 수법이 많아졌다. 최근 적발된 비밀공장들은 흔히 떠올리는 한적한 농가가 아니라 대담하게 주거지나 상가 지역에 차리는 사례도 많다. 지난해 6월 30여 t 분량이 적발된 짝퉁 신발 제조자들은 공장은 부산 사상구에, 자재를 보관하는 비밀창고는 부산 북구에 두고 밤에 몰래 자재를 옮기며 수사망을 피했다. 2010년 서울 이태원에서 적발된 위조품 판매자들은 매장에 폐쇄회로(CC)TV를 설치하고 비밀통로까지 만들었다. 여성 전용 사우나에 판매대를 차리는 경우도 있다.

짝퉁, 수요 있으니 공급 생겨

짝퉁 제조 기술자들을 검거해 놓고 보면 생계형인 이들이 많다. 대형 업체가 가방이나 신발 시장을 장악하는 바람에 일자리를 잃은 기능공들이 유혹에 빠진 경우다. 수사관들은 기술자를 좀 더 대우하는 사회였다면 이들이 범죄의 길에 빠지게 됐을까 생각한다고 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제보와 방대한 압수 물량에 도리어 수사관들이 고개를 젓게 될 때도 잦다. 짝퉁이라도 좋으니 명품 가방 하나는 들고 다녀야겠다는 수요가 있으니 공급이 생긴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한 수사관은 철없던 시절에는 왜 우리가 사회적 약자가 아닌, 돈 많은 명품 기업을 보호해야 하는 걸까 고민하기도 했다고 털어놨다.

이 소장은 위조 상품을 구할 수 없게 되면 사람들이 덜 비싸고 실속 있는 국산 제품을 찾게 될 것이라고 믿고 일한다며 명품 없어도 괜찮다는 의식 개혁 노력도 있었으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장강명 tesomio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