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한국 강제병합 원천무효 선언한 일본 지식인 105명

올해 일본의 한국 강제 병합 100년을 맞아 한국과 일본의 지식인들이 1910년 8월 22일 체결된 한일 병합조약이 무효임을 선언하는 공동 성명을 발표했다. 한국에서 109명, 일본에서 105명의 지식인들이 심도 깊은 토론을 거쳐 성안한 이 성명서는 일제의 한국 병합에 대해 대한제국의 황제로부터 민중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의 격렬한 항의를 군대의 힘으로 짓누르고 실현시킨, 문자 그대로 제국주의 행위이며 불의부정()한 행위였다고 규정했다.

이 성명에는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소설가 오에 겐자부로, 와다 하루키 도쿄대 명예교수, 사카모토 요시카즈 도쿄대 명예교수 등 저명인사들이 참여했다. 이들 지식인들이 한국의 지식인과 공동보조를 취하면서 일본 정부를 향해 과거사에 대한 직시를 촉구한 것은 초유의 일이다. 일본 정부는 새로운 한일 관계 정립과 동아시아의 미래까지 내다보는 이들의 충정에 귀 기울여야 한다. 일본 지식인들이 한일 병합이 무효라는 점을 인정한 것은 큰 진전으로 향후 한국과 일본 사이의 역사 문제를 풀어나감에서 중요한 실마리를 찾은 것으로 평가할 만 하다.

1910년 대한제국 총리대신 이완용과 일본의 조선 통감 데라우치 마사타케 사이에 조인된 한일 병합조약은 명백히 일제의 폭력과 강압 속에 이뤄진 불법적인 것이었다. 이 조약이 원천적으로 무효라는 점은 우리에게 전혀 새로울 게 없다. 하지만 가해국인 일본이 이를 완강히 부인함으로써 두 나라 사이에서 가장 첨예한 역사적 쟁점이 되어왔다. 성명서도 한일 병합조약을 어떻게 보아야 할지에 대해 한국 일본 양국의 정부와 국민이 공감하는 인식을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문제야 말로 두 민족 간의 역사 문제의 핵심이며 서로의 화해와 협력을 위한 기본이라고 밝혔다.

일본은 당초 대등한 입장에서 양국의 자유의지에 따른 조약이라는 주장을 폈으나 1995년 무라야마 수상 시절 한걸음 물러서 강제적인 것이었지만 조약 자체는 유효했다는 합법() 부당론을 견지해 왔다.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 과정에서 체결된 한일협정에서도 양국은 1910년 8월 22일 및 그 이전에 한일 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은 이미 원천 무효라고 선언했으나 이미 원천 무효라는 표현을 놓고 우리 측은 체결 당시부터 무효라고 해석했다. 반면 일본 측은 원래는 유효했지만 1948년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에 따라 효력을 상실했다는 상반된 입장을 보였다.

일본이 역사적 진실에 눈을 감고 한일 병합조약의 유효성을 계속 고집하는 한 과거사 청산과 화해는 불가능하다. 이 조약이 유효하다는 주장은 일본의 식민지 지배가 정당했다고 강변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당시 조선의 독립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했던 독립투사들의 활동조차 조약 유효론 앞에선 불법적인 것으로 되고 만다. 이 성명은 1993년 미국 의회가 하와이 병합의 전제가 된 하와이 왕국 전복 행위를 불법한 행위였다고 인정하고 사죄하는 결의를 채택했듯이 일본에서도 새로운 정의감의 바람을 받아들여 침략과 병합, 식민지 지배의 역사를 근본적으로 반성하는 시대가 오고 있다고 천명했다.

이태진 서울대 명예 교수는 일본 지식인 참여자 중에 역사학자 등 학자들이 많은 것은 일본 학계의 분위기가 그간의 연구 성과를 통해 달라졌음을 보여준다이라면서 이들은 역사를 바로 보는 것이 일본의 짐을 더는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전했다. 그러나 과거사 문제에 전향적인 자세를 보일 것으로 기대됐던 일본 민주당 정권 역시 역사교과서를 통한 부끄러운 과거사 감추기를 강화하는가 하면 관료들의 과거사 망언도 계속되고 있다. 과거사 문제가 진전하기는커녕 오히려 역주행하는 느낌이다. 지금이라도 일본 정부는 이번 지식인들의 한일 병합조약 무효선언을 더 무겁게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이 성명에 참여한 미야지마 히로시 성균관대 교수는 강제병합 100년을 맞는 2010년이 역사 문제 해결을 위해 좋은 시점이라며 올해 안에 획기적 전환점을 마련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두 나라 정상은 올해 안에 한일 병합조약의 무효성에 대해 공감대를 만들어내도록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무엇보다 일본이 달라져야 할 것이다. 한일 병합조약이 무효라면 한일 관계의 지속적인 걸림돌이 되고 있는 독도 문제 역시 새 국면을 맞게 된다. 일본은 한일 관계 전반에 걸쳐 인식의 틀을 새로 짜야할 시점에 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