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주와 가오슝() 서로 공명하는 동아시아
예전에도 본 적이 있는 광경 같다--.
3월 22일에 있었던 대만 총통 선거를 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3개월 전 한국 대통령 선거와 너무도 비슷했기 때문이었다.
유력 후보가 텔레비전에서 불꽃 튀기는 토론을 한다 싶더니, 이번에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상대 후보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집회는 인산인해를 이루어 마치 롹 가수의 콘서트 같은 분위기였다.
그러한 열기뿐만이 아니라, 선거 구도까지도 같다고 말해도 좋을 것 같았다.
일찍이 목숨을 걸고 민주화 투쟁을 한 진영이 집권 여당이다. 이들을 탄압했던 독재 정권의 맥을 잇는 진영이 이에 맞서 도전했다. 그리고 정권이 교체되었다. 2대 정당제를 목표로 하지만, 정권 교체가 이루어지지 않는 일본과는 다른 민주주의가 한국과 대만에서는 자라고 있는 듯 했다.
그 토대에는 긴 독재 정권 시대의 체험과 독재를 무너뜨리려 한 민주화의 에너지가 있었을 것이다. 이런 생각들을 하면서 한국과 대만의 민주화 역사를 되돌아보면, 이 또한 실로 비슷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들은 1980년경에 일어난 사건에 초점을 맞춰 보았다. 한국에서는 광주 민주화 운동, 대만에서는 메이리다오() 사건이 있었다. 민주화를 요구하는 사람들을 독재 정권이 탄압하자, 오히려 민주화의 불길은 타올라 걷잡을 수 없게 되었다. 비슷한 사건이 거의 같은 시기에 일어난 것은 우연이었을까.
1980년 5월 18일. 한국 광주시에서 택시 운전기사를 하던 이행기() 씨(56)는 그 날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그 날도 연일 이어지고 있던 학생 데모쯤으로 생각했었는데, 학생들이 군인에게 쫓겨 다니며 곤봉으로 두들겨 맞고 있었다. 보고 있기 안타까워서 부상당한 학생들을 차에 실었다. 군인들은 운전기사와 시민들에게까지도 기습을 해 왔다. 이렇게 광주 민주화 운동은 시작되었다.
그 다음날 이후도 시민들의 항의 데모가 이어졌고, 계엄군과 시민들은 서로 노려보며 맞서 있었다. 헤드라이트를 켜고 클락션을 울리면서 택시와 버스가 데모에 참가해, 차량들은 열을 맞추어 조금씩 계엄군을 향해 나아갔다. 300대를 넘는 자동차가 집결해, 택시 부대라는 말이 생겨났다. 이 씨도 그 대열 속에 있었다. 전방에는 장갑차나 총을 든 군인들이 보였다.
전혀 두렵지 않았다. 주위에는 많은 시민들이 함께 있었고 반대로 용기가 솓아났다. 이윽고 최루탄이 발사되었고, 주변은 한 순간 흰 연기로 앞을 볼 수 없었다. 갑자기 군인들은 총으로 차 앞 유리를 깨고 이 씨를 차 밖으로 끌어내어 무자비하게 두들겨 팼다. 데모에 참가했던 시민들은 뿔뿔이 도망을 치고 이 씨도 병원으로 옮겨졌다.
민주화를 외치는 학생들의 데모는 하나의 계기에 지나지 않았다. 무차별 폭력에 대한 일반 시민들의 분노가 투쟁의 원동력이 되었다. 먹을 것을 나르면서 투쟁을 지지한 여성들도 있었다.
지금도 매년 5월에는 그 날처럼 택시가 대열을 짜서 거리를 달린다. 동료들과 광주 시민의 희생이 있었기에 민주화를 완수할 수 있었다고 우리는 자부합니다.
민주화 운동의 첫 걸음 / 생일잔치를 구실로 모임을
한편, 광주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기 1년 전인 1979년 12월, 대만에서 일어난 것이 메이리다오() 사건이다.
그로부터 6년 전, 미국 유학에서 돌아와 변호사를 하고 있던 야오자원() 씨(69)는1979년 12월 어느 이른 아침에 자택에서 체포되었다. 군사 재판에서 반란죄로 징역 12년을 받아 옥중 생활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이듬해인 1980년 2월에는 이 사건으로 체포된 동료의 집이 습격을 당해 야오자원씨의 모친과 어린 딸들이 무참히 참살당하는 사건도 일어났다.
하지만, 이 사건으로 대만의 상황은 크게 바뀌고 민주화가 진행되었다. 이렇게 지난날을 회고하는 야오() 씨는 1987년 가석방을 되어, 결성된 지 얼마 안 되는 야당 민주 진보당()의 주석이 되었다. 지금은 천수이볜() 정권에서 인사를 담당하는 고시원()의 원장을 맡고 있다.
사건 당시의 대만은 중국 대륙에서 공산당과의 내전에 패배하고 도망쳐 온 국민당의 독재가 이어지고 있었다. 1949년부터 내려진 오랜 계엄령으로 인해 보도와 결사의 자유도 없었다. 그럼에도 야오씨 일행은 1970년대 후반부터 결혼식이나 생일잔치를 구실로 모여 민주화 운동을 시작했다. 메이리다오()라는 잡지사를 만든 것도 국민당 이외의 정당 창당이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살벌한 공기가 완화된 것은 국민당의 카리스마적 리더였던 장제스()가1975년에 사망한 것이 컸다고 야오씨는 실감한다. 이 점을 보더라도, 18년 동안 장기 집권을 한 박정희 대통령이 1979년 측근에 의해 암살된 한국의 상황과 대만은 비슷했다.
후계자들에 의한 무력 탄압은 시민의 반발을 불러 일으켰을 뿐 아니라, 국제 사회의 감시도 받게 되었다.
야오 씨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해외의 인권 단체들도 방청을 하러 온 법정에서, 제대로 계엄령 해제 등의 주장을 할 수 있었다. 예전에는 하루 만에 내려진 판결이 일주일 이상이나 소요되었고, 반란죄로 선고받은 징역 12년은 제일 가벼운 것이었다. 나를 사형을 시킬 수 없었던 것은 국민당에게 있어 큰 손실이었다고 하겠지요.
타이완()대학의 저우완야오() 교수(52)는 메이리다오 사건의 의의를 대만 섬 전역에 정치에 대한 각성을 불러일으킨 점으로 보고 있다. 무관심했던 대만인들이 정치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국민당은 예전처럼 탄압으로 민주화를 억제할 수 없다는 것을 자각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렇다고는 해도 진정한 민주화는 1987년 계엄령이 해제될 때까지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같은 해인 1987년 대규모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 독재 정권 측이 민주화 선언에 하지 않을 수 없었던 한국과 이 점에서도 대만은 대단히 비슷하다.
실은 저우() 교수도 학생 시절 민주화 운동을 한 체험했다. 자극을 받은 것은 한국이었다고 한다. 여성이 철조망을 빠져 나가 싸우는 모습을 보고 같은 여성으로서 격려를 받았습니다. 한국에서는 대규모로 데모를 할 수 있어 부럽다고 생각한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나치게 치열한 운동에는 광주 민주화 운동과 같은 탄압도 따른다는 교훈도 얻었기 때문에, 대만은 1980년대에 철저히 비폭력을 지켰다. 그렇게 회고하는 민주화 운동 투사도 있다.
보도의 자유는 없다 / 메모를 숨겨서 일본으로
한국은 이런 식으로 대만에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그 당시 한국에서는 국내에서 일어난 일임에도 불구하고 광주 민주화 운동을 국내 신문이나 텔레비전은 제대로 보도하지 않았다.
거기에 정보의 바람을 불어 넣은 것이 이웃나라인 일본의 소식통, 이와나미() 서점의 월간지 세계에 1973년부터 88년까지 연재되어 군사 독재 정권을 계속 고발해 온 한국으로부터의 통신이다.
당시, 학생 운동으로 당국에 감시를 받고 있던 서울 대학의 박세일() 교수(59)는 1973년에 일본으로 유학해 한국으로부터의 통신을 읽었다고 한다.
이 통신을 비롯해서 일본으로부터 배워야 할 점이 많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훌륭한 선생님도 많이 계셨고, 한국의 민주화 운동을 도와 준 친구도 있었습니다. 일본은 아시아의 민주화에 많은 공헌을 한 것 아니겠습니까.
서울 고려대의 최장집() 교수(64)처럼 미국 유학 중에 읽은 사람도 있다.
당시 한국 매스컴은 완전 통제 하에 있었기 때문에 국내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민주화 운동을 하던 학생도, 그 통신을 통해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통신이 거꾸로 한국에 전해져 학생과 지식인들이 읽었다. 민주화 운동의 중심에 있던 소설가, 황석영() 씨(65)도 그 중 한 명이었다.
복사본이 한국어로 번역되어 암암리에 나돌았습니다. 약국 주인이 번역해 광주에서 팜플렛으로 만들었습니다.
위험을 무릅쓰고 한국의 정보를 일본으로 반입하는 보따리장수를 한 것은 일본과 한국, 독일 등의 기독교 관계자들이었다. 거기에는 많은 드라마들이 있었다.
어느 일본인 여성은 서울에서 작은 종잇조각을 건네받았다. 옥중 서간 같았다. 공항 출국 검사는 엄격했다. 브래지어 속에 숨기자. 보디 체크에도 종이의 감촉이 느껴지지 않도록 양말에 싸서 가슴 속에 넣었다.
한국으로부터의 통신을 쓴 저자 T•K생은 과연 누구인가. 오랫동안 베일에 가려져 있었지만, 2003년에 종교 철학자인 지명관() 씨(83)가 이름을 밝혔다. 집필 당시에 일본으로 망명 아닌 망명을 해 생활하면서 도쿄여자대() 교수 등을 하였다.
한국으로 돌아온 지() 씨는 최근, 1970년대부터 80년대까지의 한국과 일본의 신문 보도를 검증하는 책을 냈다. 역사를 잊어버리지 않도록 꼼꼼하게 기록해 두고자 했습니다. 내가 쓴 책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는 지금, 탈 민족주의에 관한 책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우선 한국과 일본이 협력을 해 자국 중심주의가 아닌 동아시아의 시대를 만들 때가 왔습니다.
이번 대통령 선거에서는 한 때 독재 정권의 노선을 걸었던 한나라당의 이명박 후보를 지지했다고 한다. 아시아도 세계도 변하고 있습니다. 옛 생각만을 고집하며 불필요한 대립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1980년대에는 대만의 정보를 접 할 수 없었던 한국도 민주화로 크게 바뀌었다. 2002년 광주시에서 열린 광주민주화 운동 세미나에는 대만인 여성이 한 명 초대되었다.
완미주() 씨(79)다. 1947년 무력 탄압으로 많은 주민들이 희생된 2•28 사건 때 부친을 살해당했다. 대만 민주화 운동의 원점이라 불리는 2•28사건의 유족의 한 사람으로 한국의 민주화 운동을 이끈 사람들과 대화를 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던 것이다.
완() 씨는 광주 세미나에서 본 광주 사건의 사진들이 아직도 뇌리에 생생히 남아있다고 말한다. 피해자들의 얼굴에는 눈은 어디론가 가 버려 보이지 않고 코는 무참히 내려앉아 있었어요. 2•28 사건도 마찬가지였어요. 제 아버지도 이렇게 무참히 살해당했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앞을 가렸습니다.
대만 독재 정권 시절에는 2•28 사건은 입에 담을 수도 없었다. 1992년 출판된 원 씨의 저서는 유족이 처음으로 쓴 체험기로 주목을 받았다. 재작년 일본어로 번역되어 작은 출판사로부터 일본에서도 책이 나왔다.
원 씨는 지금, 중국의 앞날에 신경이 쓰인다. 민주화 운동을 무력 탄압한 천안문 사건이 일어난 1989년 충칭()에 초대되어 학생으로부터 질문을 받았다.
천안문 사건은 정말로 일어난 일입니까? 예전의 대만처럼 정보 통제가 계속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란 생각을 하고 있는데, 또 다른 학생이 저를 대만으로 데리고 도망가 주세요라고 말했다. 그 학생은 그 후 어떻게 되었을까.
이 시리즈를 매듭지으면서 다시 찾고 싶은 장소가 있었다. 제1장에서 다룬 아편 전쟁의 현장이다.
일찍이 영국군이 공격 해 온 중국의 광저우() 시내에는 일본과 한국이 곳곳에 널려 있었다. 현지 공장에서 생산된 도요타, 혼다와 한국의 현대의 자동차가 달리고 있었고, 거리에는 일본 영화와 한국 드라마의 DVD를 팔고 있었다.
지하철역에는 후지산과 벚꽃이 어우러진 컬러플한 광고가 벽을 뒤덮고 있었다. 일본 국제 관광 진흥 기구가 일본에 꽃놀이 오세요란 캠페인을 하고 있었다.
광저우()에서 제일 한 국제여행사는 지난 한 해 동안 일본에 1만 8천명의 관광객을 보냈다. 지난해의 2배입니다. 중국도 생활이 풍부해졌고 이제 해외여행은 생활의 일부가 되었지요. 일한 본부장을 맡고 있는 챠오웬치()씨는 이렇게 말했다.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었다. 광저우의 신문 남방 주말의 쿠오리() 기자(28)다. 작년 봄 도쿄()대학에서 열린 일・중・한 저널리스트 대화에 참가한 후, 각도를 바꾸어서 일본을 바라보자라는 기사를 써서 화제를 모았다.
중국에서는 일본이 군국주의의 길을 달리고 있다고 보고 있었지만, 실제 일본에 가서 보니 달랐다는 글을 썼더니, 일본으로부터 돈을 받았냐라며 인터넷상에서 비난을 받았습니다.
지금은 대만의 정치를 쫓고 있다.
민주화는 중국이 제일 늦습니다. 일본과 한국, 대만의 민주화는 앞서 나가 있어 중국에 많은 참고가 됩니다. 대만 총통 선거 때에도 어느 쪽이 이겼는지가 아니라 민주화의 한 예로 관심을 가지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한 시대에서 다음 시대로 역사는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동아시아는 서로가 연결되어 있다. 고립해서는 살아갈 수 없다. 이런 느낌들을 받았다.
구마모토 신이치(隈), 니시 마사유키(
[광주 민주화 운동]
한국 내에서 민주화의 기운이 높아지고 있던 1980년 5월 17일, 전두환을 중심으로 하는 육군의 소수 강경파가 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김대중 등 야당의 유력 정치가와 학생 운동의 지도자들을 구속했다. 김대중의 정치 지지 기반이며 격렬한 데모가 일어나고 있던 전라남도의 중심 도시 광주에는 계엄군을 파견했다. 계엄군은 그 다음날인 18일, 전남 대학 학생들의 항의 데모를 탄압하였다.
에 따르면, 2004년 현재 사망자 수는 207명, 부상자 2,392명으로 판명, 그 외 다수의 행방불명자등이 있다. 1995년 5•18 민주화 운동 등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어 전두환, 노태우 양 전 대통령이 이 사건으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한국에서는 5•18 광주 민주화 운동, 광주 민주(민중) 항쟁이라고도 부르고 있다.
[메이리다오() 사건]
국민당의 일당 지배하에 있던 1979년 12월에 대만 남부 가오슝()시에서 일어난 반체제 운동 탄압 사건으로, 가오슝() 사건이라고도 부른다. 반체제 지도자였던 황신지에(黄) 씨를 발행인으로 같은 해 5월 창간된 잡지메이리다오()(대만 별명)가 가오슝()시에서 12월 10일 세계 인권의 날을 기념한 집회를 기획했다. 이를 당국이 무허가라는 이유로 저지하려 하자 모인 시민들과 충돌이 벌어져, 200명에 가까운 부상자를 내는 등 큰 혼란이 발생했다. 황(黄) 씨 외에도 현 부총통인 뤼슈롄() 씨 등, 메이리다오측의 인물이 군사 재판에 회부되어 반란죄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모두 이후의 민진당() 지도층이 인물들로, 재판 당시 변호인으로는 현 천수이볜() 총통과 이번 총통 선거 때 민진당의 정부() 총통 후보가 된 셰창팅() 씨, 쑤전창() 씨가 있다.
올림픽, 세계에 대한 자신감을 얻는 장치
올 여름 베이징()에서 올림픽이 열린다. 1964년 도쿄() 올림픽, 1988년 서울 올림픽. 동아시아에서 열린 올림픽은 그 나라와 국민들에게 무엇을 남겼는가. 그리고 베이징 올림픽은.
1964년 도쿄 /3분에 인생이 바뀌었다 성화 봉송 주자
성화의 불꽃이 지금도 타오르고 있다. 이 말을 듣고 가고시마(児)로 날아갔다. 1964년에 열린 도쿄() 올림픽에서, 아테네에서 채화된 성화가 오키나와(縄)를 경유해 비행기로 옮겨진 일본 본토 최초의 땅이다.
가고시마시의 교외에 있는 현립 청소년 연수 센터. 희망의 불이라 이름을 붙인 그 불은 본관 로비의 선박용 램프 안에서 오렌지색으로 불타고 있었다. 3센티 정도의 불꽃이 하늘거리고 있었다.
1982년에 당시, 연수 센터의 차장이 아는 이로부터 양도를 받았다. 아는 사람은 성화 릴레이 당시, 낙도의 초등학교 교장으로부터 섬에 사는 아이들에게도 보여 주고 싶다는 간곡한 부탁을 받고 남몰래 성화를 옮겨 자택에 보존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후, 직원들이 일주일에 한 번씩 급유와 청소를 하면서 불을 지켜왔다. 손에 촛불을 들고 모이는 모임이나 캠프파이어 등에 사용한다. 하마시마 마스미(真) 연수 주사(47)는 작은 불꽃이지만. 많은 사람들의 정성이 담긴 불꽃이지요. 전후 부흥의 상징으로 세계의 인정을 받은 도쿄 올림픽인 만큼, 같은 불꽃이라도 느낌이 다릅니다라고 이야기한다.
그 성화 릴레이의 최종 주자는 당시 와세다()대학 학생이었던 사카이 요시노리() 씨(62)다. 히로시마()에 원폭이 투하되던 날 태어났고 달리는 폼이 멋있다고 하여 선발되었다. 일본 전역의 주목을 한 몸에 받았다. 그 후 어디를 가더라도 모르는 사람들이 말을 걸어 왔다고 한다. (성화를 손에 들고 달린) 3분이 인생을 바꾸었다.
패전의 어려움을 딛고 재기에 성공한 일본을 세계에 알린 도쿄 올림픽. 국민 한 사람 한사람의 참여 의식이 대단했다. 그래서 나는 비뚤어진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고 지금도 생각한다. 당시를 아는 사람들의, 그 당시 가졌던 희망을 깨버릴 수는 없다.
올림픽을 전후로 도쿄에는 고층 빌딩이 건설되고 신칸센도 개통되었다. 평론가 마쓰모토 겐이치() 씨(62)는 구미를 따라 잡으려고 필사적으로 달려 온 일본이 그근대 일본이란 틀을 벗어나 구미의 수준이 되었다고 의식을 전환한 것이 도쿄 올림픽이었다고 한다. 올림픽은 발전 도상에 있는 아시아의 각 나라가 세계에 인정을 받게 되었다는 자신감을 얻는 장치라고도 할 것이다.
1988년 서울 / 비판적이었던 김영삼 이제는 평가
1988년 서울 올림픽을 개최한 한국. 인터넷 신문 오마이 뉴스의 이병선() 부국장(43)은 1986년에 고려대 학생회장이 되어 민주화 운동을 주도했다. 무력으로 실권을 잡은 전두환() 정권의 정통성이 세계로부터 인정을 받게 된다라며 올림픽 개최를 반대했다.
민주화 운동은 일반 시민에게도 확산되어 이듬해인 1987년에는 최고조에 달했다. 정권 여당은 6월 말 민주화를 약속했다. 정부는 올림픽을 앞에 두고 세계적으로 고립되는 강경 수단은 쓸 수가 없었다. 올림픽 유치는 결과적으로 민주화에 큰 공헌을 했다.
TV로 개회식을 본 이 씨는 이런 잠재력이 이 나라에 있었는가라며 가슴이 뭉클해졌다. 또한, 그는 일본 신문사의 서울 지국에서 일을 하면서 일본인 기자들이 한국의 사회와 문화 등 다양한 부분을 취재하는 모습들도 가까이서 보았다. 올림픽은 단순한 운동회가 아니라, 한국의 모습을 세계에 전하는 역할도 담당한다는 것을 알았다.
1987년에 야당인 통일 민주당의 총재로 취임했던 김영삼 전 대통령(80)은 취임 당시 서울 올림픽을 나치 지배하의 베를린 올림픽에 비유하는 발언을 했었다. 지금은 올림픽은 한국이 정치적, 국제적으로 발전하는 기회가 되었다. 국민들에게 일류 국가가 될 수 있다는 용기를 주었다고 평가한다. 멀게 만 느껴졌던 소련의 사람들이 한국에 온 것도 컸다고도 회상한다.
반공주의 국가였던 한국에게 있어 소련이나 중국 등 사회주의 진영은 이른바 적이었다. 국교도 없었다. 당시 고등학교 교사였던 류연창() 씨(60)는 양 국 선수들을 보고우리와 똑 같은 인간이다. 서로 대화를 할 수 있는 상대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마음이 글로벌화 되었다.
올림픽을 발판으로 한국은 북방 외교를 전개하여 소련, 중국과 국교를 정상화시켜 갔다. 올림픽 후에는 외국 여행도 자유화되었다. 교회 단체에서 민주화 운동에 참가했던 오재식() 씨(74)는 올림픽으로 모든 국제적인 표준들이 한국에 들어와, 시민들에 대한 교육 효과도 있었다. 민주화, 평화, 인권에 대한 세계의 전망을 배웠다고 지적한다.
선진국을 목표로 하는 나라에 있어서, 올림픽은 급격한 개발을 동반한다. 공해와 강제 철거 등 마이너스의 부분도 있다. 그러나 일본과 한국에서는 나라의 도량을 넓히는 역할을 했다.
정치와 스포츠는 별개라고 한다. 그러나 서울 올림픽 조직 위원장이었던 박세직() 재향 군인회 회장(74)은 스포츠를 통하여 사고가 바뀌면 정치도 따라 바뀐다고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한국인으로서의 자긍심을 갖게 된 것이다. 국민의 자신과 자긍심은 마음의 여유를 낳았고, 그 나라를 다음 발전 단계로 향하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2008년 베이징() / 개발 일변도의 전환점이 될 것인지
줄 서요. 줄 서! 내리는 사람이 먼저예요.
오후 5시가 넘어 통근 객으로 북적이는 베이징()시 건국문 밖의 지하철 홈에서 여성들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모두 노란색 재킷에 질서를 지키자는 슬로건이 적힌 빨간 어깨띠를 매고 있었다. 수도 정신문명 건설 위원회가 추진하는 매너 향상 캠페인의 활동 부대였다.
이 위원회에서는 질서를 지키는 매너와 침을 뱉을 때는 화장지를 사용하자는 등의 운동을 추진하고 있다. 올림픽을 위해서라고 말하는 것만으로도 효과가 있다며 정모지에(黙) 부주임은 말한다.
베이징에서는 건설 붐이 계속되었고 지하철 등 교통망 정비도 진행되고 있다. 회계사 몽웨이홍() 씨(44)의 집 가까운 곳에도 곧 지하철이 개통되어, 버스로 30분은 걸렸던 시내 중심부까지 10분에 갈 수 있게 된다. 예전에는 악취가 풍기던 근처의 강도 깨끗하게 정비되었다. 교통과 환경 면에서는 변화를 실감합니다. 몽() 씨는 지난 30년 동안의 개혁과 개방으로 중국 사람들의 생활수준은 아주 높아졌다며 자부심을 보였다.
올림픽 조직 위원회에 의하면, 경기장에 필요한 자원 봉사자 10만 명에 대해 90만 명이 신청했고 영어 공부를 시작한 시민도 적지 않다고 한다.
국무원 발전 연구 센터 연구원 장윤환() 씨(63)는 올림픽에서는 경제보다 정치, 정치보다 문화가 중요하다고 지적한다. 민족 진흥에는 평화적인 이념과 철학이 필요하다. 올림픽은 그것을 키우는 계기가 될 것이다라고 했다.
중국 정부는 2004년 헌법에 인권의 존중과 보장을 포함시켰다. 정부 비판을 계속해 온 프리라이터 리우시아오보(暁) 씨(52)는 조금씩이지만 언론의 자유와 인권을 요구하는 움직임이 인정받게 되었다. 단, 티벳 자치구 등에서 소란이 일어나 올림픽에 대한 영향이 주목을 받고 있다. 정부는 침착하게 대화하는 것이 좋다고 말한다.
일본에서 활동하는 저널리스트 모방후() 씨(55)는 베이징 올림픽을 입춘이라 비유한다. 그 날의 전후로는 차이가 확실하지 않지만, 꽃이 피는 봄을 부르는 절기다. 중국은 격차 등의 문제도 안고 있지만, 올림픽은 개발 일변도를 바꾸어 놓는 전환점이 되지 않을까라고 본다.
오오쿠보 마키(真)
지식인 20 명에 듣는다 - 동아시아 근현대사의 10 대 사건은? 20
우미챠() 대만 역사 박물관장
형님 격이 있어서는 만들 수 없다
동아시아 각 국의 역사라는 시점에서 10 대 사건을 선택할 것인지, 동아시아라는 스케일로 선택하는가에 따라 다른 가능성이 있다. 동아시아 전체에서 이 150년을 본다면, 중화 제국 패권의 붕괴 일본 제국의 성립과 붕괴 미국 패권의 확립 중국의 재기와 대두라는 4가지 주제로 정리 할 수 있다.
하지만, 대만의 입장에서 보면 달라진다. 일청 전쟁과 대만 식민지화가 가장 중요하다. 전쟁으로 동아시아 내부의 권력 구조가 바뀌었다. 일본 제국의 발전과 붕괴로 이어져 갔다.
그 때까지 대만에는 국가가 없었지만, 거기에 강력한 식민지 정부가 들어섰다. 대만인에게는 하늘에서 현대 국가가 뚝 떨어진 것 같았지만, 그것은 식민지주의의 현대 국가였다.
20 세기 중반 이전의 동아시아에서 최대 시나리오는 일본과 중국의 흥망이다. 서로를 적대하면서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받으며 배워왔다. 그리고 20 세기 후반이 되어 제 3세력인 미국이 동아시아에 들어왔다. 그것이 냉전 체제이다.
20 세기 후반부터는 아랍 세계의 저항을 제외하면 온 세상이 미국의 영향을 받고 있다. 미국의 진출에 의한 글로벌화는 생활의 균질화와 편리함을 가져왔지만, 지역의 전통 문화가 사라져 버렸다. 어릴 적부터 맥도날드에서 자란 세대는 전통의 맛을 모른다.
중국의 대두는 21 세기에 사는 누구나가 직면하고 있는 큰 과제이다. 인구와 토지의 크기에서부터 환경문제에 미치는 파괴력은 엄청나다. 군비 확장이 계속되면 은연중에 군사 대국이 된다. 세계는 중국의 발전 가능성에 기대하고 있지만, 인류 문명이 함께 안고 가야 할 폭탄이기도 하다.
일본은 만주 사변 이후, 자신의 세력 팽창을 제어할 수 없게 되었다. 만주국으로 만족했다면 일본 제국은 붕괴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일본이 왜 15년 전쟁에 돌입해 갔는지, 나도 잘 모른다. 일본의 대동아 공영권은 구미에 대항한다는 면에서는 일부 올바른 방향도 있었다. 단지, 구미는 너무 강력해 대항할 수 없었던 것이 문제였다. 실지로 일본은 중국에게 진 것이 아니라 미국에게 진 것이다.
전후 일본의 역사학자가 일본 근대사를 기술할 때에, (일본 본토 등) 4개 섬의 역사로 보고 있는 것에는 의견을 달리한다. 좋다, 나쁘다는 제쳐 놓고라도 20 세기 전반의 일본은 틀림없이 제국으로서 존재했기 때문에, 이 사실은 제대로 직시해야 한다.
동아시아의 내셔널리즘에 대해 생각해 보자. 우리는 내셔널리즘을 강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내셔널리즘은 19 세기 중반 이전처럼 강제적이고 폭력적인 것은 아니다. 근대주의의 반성 위에 선, 21 세기의 자주적이고 평등한 내셔널리즘이 아니면 안 된다. 그 때가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내셔널리즘을 대신하는 새로운 말이 등장할지도 모르겠다.
일본에게는, 대만 고유의 특색 있는 새로운 사회 만들기와 정치 통합을 위한 운동을, 존중하며 지켜봐 주기를 바란다. 일본은 50년에 걸친 대만과의 식민지 관계를 이해해야 하고, 이러한 대만의 노력에 무관심해서는 안 된다.
동아시아 공동체는 형님 격 (중국)이 있어서는 만들 수 없다. 게다가 역사의 감정의 골이 있다. 서로를 공격하여 자신들의 내부 모순을 해결하려 해 왔다. 동아시아 공동체는 대만과 같이 확장주의적, 군사적, 제국주의적이 아닌, 내셔널리즘을 공유할 때에만 비로소 가능하게 될 것이다.
인터뷰: 다무라 히로쓰구()
약력
1956 년생. 타이완(湾)대학 역사학부 교수. 도쿄()대학 대학원 수료. 편저에대만사 소사전, 기억하는 대만-제국과의 상극등이 있다. 박물관은 내년에 정식으로 개관한다.
리스트
일청전쟁과 대만의 일본 식민지화
미국의 동아시아에서의 정치•군사•문화적 영향
중국의 개혁•개방
중일 전쟁과 태평양 전쟁
*이하는 시대 순
아편 전쟁과 중국의 개국
메이지 유신과 일본의 개국
일본의 조선 병합
신해() 혁명
중화 인민 공화국의 성립
조선 전쟁(한국 전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