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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장 아시아•태평양전쟁과 국공 내전(国内戦)

제7장 아시아•태평양전쟁과 국공 내전(国内戦)

Posted March. 03, 2008 18:40   

국공 양군에 잔류 일본인이 있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은 전쟁에 지고 평화로운 전후가 시작되었다. 오늘날 대부분의 일본인은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일본이 아시아를 침략한 것으로 말미암아, 패전 후에도 현지에 남겨져 전후의 전쟁을 이국의 병사로서 싸운 사람들도 있었다.

설마 우리 할아버지가 그런 경험을 하였으리라고는이라고 말하는 한 명의 학생을 만났다.

도쿄도() 마치다시()에 있는 오비린(桜)대학 2 학년, 아베 다쿠미( 真) 씨(22)다. 1945년 3월에 소집되어 중국에서 싸운 할아버지 요시오() 씨는, 일본의 패전으로부터 9년이나 지난 1954년에 귀국하여, 초등학교 교사를 해 왔지만, 1963년 38세의 나이로 병사했다. 다쿠미(真) 씨가 태어난 것은 22년 후로, 할아버지의 일은 아무것도 모른 채 자랐다.

후쿠시마()에 사는 할머니 데루코() 씨(73)도, 중국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요시오() 씨로부터 들어본 적이 없다. 혹시 남편이 침묵한 의미를 알 것 같은 느낌이 든 것은, 2007년 2월에 어떤 영화를 보았을 때였다고 한다. 전후에 중국 국민당 군으로서 공산당 군과 싸운 일본병사들을 그린 다큐멘터리 영화 개미 병사들() (이케야 가오루( 薫) 감독)이다.

9월 도쿄()에서 열린 상영회에 다쿠미씨는 할아버지의 사진을 가지고 갔다. 강연 차 와 있던 영화의 주인공, 오쿠무라 와이치(奥 ) 씨(83)에게 사진을 보여 주자, 젠프가 아닌가!라고 말했다. 이름을 중국식으로 부르던 사이로 소년병 훈련 시절부터 중국 내전까지 같이 했고, 일본에도 함께 돌아왔다. 그런 전우의 손자와 이런 식으로 만나리라고는 오쿠무라(奥) 씨에게도 감격적인 대면이었다.

오쿠무라 씨와 같은 군인들은 왜, 전후에도 싸워야만 했을까. 아베 요시오 씨는 왜 입을 다문 채 죽어 갔을까. 나는 옛 전쟁터를 방문하기로 했다.

중국 산시성()의 도읍인 타이위안(). 여기에 전쟁 중, 일본군 지나() 파견군 북지나 방면군 제 1군사령부가 설치되었다. 소집을 받은 오쿠무라씨는 1944년 말에 타이위안() 북쪽에 위치한 닝우()에 도착했다. 영하 20도로, 눈이 많이 오기로 유명한 니가타() 출신인 오쿠무라씨도 견디기 힘든 아주 추운 날씨였다고 한다.

사실이지 지금도 이 곳은 춥다. 1948년 국민당 군으로서 격투를 거듭하다가, 100명을 넘는 일본병사가 사망한 타이위안교외의 뉘우토어짜이()의 포대()의 옛 터를 보고 싶었지만 , 눈이 많이 쌓여 가까이 접근할 수가 없었다.

장병 2600명 / 상관의 명령으로잔류

일본은 1945년 8월, 포츠담 선언을 수락하고 항복했다. 장병들은 무장 해제하고 귀국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제1군 5만 9천 명 가운데 2600명이나 잔류하여, 공산당 군과의 전투에서 550명이 사망했고, 오쿠무라씨 등 700명 이상이 포로가 되었다.

그럼요, 물론 일본에 돌아가고 싶었지요라고 오쿠무라씨는 말한다. 그렇지만, 상관이 남으라고 명령하면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군대에서는 상관의 명령은 천황의 명령. 항명이나 반항할 수 없습니다.

왜 그들은 조직적으로 잔류하였는가. 전사한 친구들의 한()에 이끌리기라도 한 듯 오쿠무라씨 등은 일본과 중국에서 단서를 찾아 다녔다. 그리고 지금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

당시의 산시성()은 국민당 계열의 군벌 리더인 옌시산()이 지배하고 있었다. 그러나 공산당이 세력을 키우고 있었고, 일본의 철퇴 후 내전으로 돌입하게 되면, 옌시산() 군의 열세는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한편, 일본의 제1 군사령관, 스미타 라이시로(郎) 중장들에게는 전범 용의가 걸려있었다. 그래서 일본군측과 옌시산측은 일본군을전범으로 처벌받지 않는 대신에 옌시산() 을 위해 일본군 일부를 남기겠다는 거래를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귀국한 오쿠무라씨 등은 자신의 의사로 잔류했다고 간주되어, 일본 정부로부터 구 군인으로서의 보상을 받을 수가 없었다. 정부를 대상으로 퇴역군인 연금 청구 관련 재판에서도 패소했다.

1948년 7월에 오쿠무라씨가 중상을 입고 포로가 된 남쪼엉촌(: 타이위안에서 남쪽)을 방문하였다. 벽돌담 여기저기에 총탄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이 조그만 마을에서 국민당 군은 공산당 군에게 포위되었다. 당시 14세였던 농민, 류이옌첸( ) 씨의 집에는 20명 정도의 일본병사가 점거해 2일 동안 있었다고 한다. 류이() 씨는 뒷마당 지하에 숨어서 전투가 끝나는 것을 기다렸다.

일본 병사도 많이 죽었고, 시체를 방에 겹겹이 쌓아 놓았다. 싸움이 끝난 후에 청소를 했지만, 시체의 기름이 마루바닥에 배어 지독했어요.

오쿠무라씨 등을 포위한 공산당 군의 기관총 반장이었던 후핀(蘋)씨(75)와도 만날 수 있었다. 지금은 은퇴해서 타이위안에 살고 있다.

일본병사에게서 무사도 정신을 느꼈어요. 옌시산 군대와는 달리 좀처럼 항복하지를 않았어요. 몇 번이고 무기를 버리는 채 하면서 공격해 왔어요. 그렇다 해도 왜 일본인이 옌시산을 위해서 목숨을 걸고 싸우는지, 너무나도 이상했어요.

타이위안은 1949년 4월 공산당 군의 수중에 떨어졌고, 잔류 일본병사들의 전쟁도 끝났다. 그 전에 포로가 된 오쿠무라씨는 1948년 12월에 베이징()으로 옮겨져 곧 톈진()의 포로수용소로 이송되었다. 1949년 1월 공산당 군은 톈진을 함락시켰고 이어 베이징에 무혈 입성했다. 그 군대 안에도 실은 일본인의 모습이 있었다.

영문도 모른 채 / 공산당 군에서 부상병 운반 대원으로

나는 타이위안에서 톈진으로 향했다.

도쿄에 사는 효도 요시키요( 清) 씨(79)가 가르쳐 준대로, 톈진 함락 전쟁에서 사망한 이들을 기리는 열사 기념비에는 전우의 이름들이 새겨져 있었다.

일본은 1932년, 중국 동북부에 괴뢰 국가인 만주국을 세워 많은 개척민들을 보냈다. 그 중에서도, 만몽개척(満) 청소년 의용대로 불린 소년들이 있었다. 효도() 씨는 1943년에 이 간부 양성 학교에 들어가기 위해서 에히메()에서 하얼빈으로 왔다. 1년 늦게 오사카()에서 온 이가 사카구치 고조( ) 씨였다.

두 사람은 그 이후의 운명을 함께 했다.

전쟁이 끝난 1946년 9월, 부상병을 운반하는 훈련이 시작되었다. 관동군(구 만주(満)의 일본군)의 부상병들을 귀국 열차에 싣기 위해서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도착한 곳은 국공 내전의 격전지로, 공산당 군의 운반병이 되어 있었다. 당시는 뭐가 뭔지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지금은 짐작이라도 가지만, 관계자에게 폐가 될까 싶어서라며, 효도씨의 입은 무거웠다.

총탄이 난무하는 전투의 최전선지에서 부상을 당한 병사들을 옮기기 시작했다. 운반 부대는 결사적이었다. 체력이 약한 효도 씨는 부상을 치료하는 위생병이 되었지만, 체격이 좋은 사카구치() 씨는 들 것을 계속 메었다.

그러던 1949년 1월 15일. 효도씨가 소속한 부대가 국민당 군의 사령관을 체포하여 톈진이 해방의 기쁨에 싸인 와중에, 사카구치씨의 비보가 도착했다. 박격포를 맞아 내장이 튀어 나와 있었다고 한다.

그 후, 효도씨는 중국 각 지의 전장을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내전이 끝난 후에는 약제사가 되어 1958년에 귀국했다. 오사카에서 사카구치씨의 유족을 필사적으로 찾아보았지만 찾을 수 없었다.

지금의 톈진에 그의 이름은 남아 있는 것일까. 확실히 기념비는 서 있었지만, 도시 개발로 부지는 잘려나가고, 전사자의 명부도 다른 묘지공원에 옮겨져 있었다. 그 곳을 방문하였더니, 직원이 안 쪽에서 명부를 꺼내 주었다. 2025 명의 이름을 순서대로 읽어 내려갔다. 마지막에 사카구치 고우키()라고 쓰여 있었다. 사카구치씨의 이름을 잘못 쓴 것임에 틀림없다.

톈진 시내에는 당시의 전투 기록을 전시하는 톈진 전역(;전쟁) 기념관도 있었다. 기념관의 전사자의 이름을 1명씩 새겨 놓은 코너에도 사카구치씨의 이름은 없었다. 일본인이 있었다고는 전혀 몰랐다. 중일 우호에 힘을 기울이고 싶기 때문에, 만약 유품이 있으면 꼭 전시하고 싶다라고 리우꽝신() 부관장(48)은 미안한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의사, 기술자・・・・・・ 억류된 채 노동당한 수만인

국민당 측과 공산당 측의 쌍방에 일본인이 있었고, 희생자도 적지 않았다. 이러한 사실이 현지에서도 잊혀지고 있는 가운데, 실증적인 연구를 시작한 사람도 있다.

사이타마현(県)에 있는 다이토 문화대()의 루시이쮠() 교수(52)는 전후의 중국이 재편되어 가는 과정에 관여한 일본인의 역할을 명백히 함으로써, 중일 관계의 다면성을 드러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다.

중국 당국의 요청이나 명령으로 강제로 중국에 남아 일을 한, 다시 말하면, 유용()당한 일본인들은, 국민당 측에도 공산당 측에도 적어도 각각 2, 3만 명은 있었습니다.

눈에 띄는 이들은 의사나 간호사, 그리고 기술자였다. 예를 들어, 중국 동북부 공산당 간부의 1948년 1월 보고서에서는 군의관인 의사와 간호사의 80%가 일본인으로서, 공산당은 고작 원장 1명을 보낼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고 한다. 산시성()에서 부상을 당해 공산당 군의 포로가 된 오쿠무라 와이치(奥) 씨를 치료한 군의관도 일본인이었다.

또, 전 관동군 비행 대장, 하야시야 이치로( 弥 郎) 씨가 부하를 인솔하여, 당시 공군이 없었던 공산당 군의 비행사를 육성하고 기술 훈련을 담당한 이야기는 중국에서는 유명하다.

요컨대, 생사를 결정하는 격렬한 내전 중에 국민당 군도 공산당 군도 부족한 부분을 일본인에게 의지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효도씨와 사카구치씨는 군사 훈련으로 단련된 젊은이라는 이유에서였을까.

귀국시키려고 해도, 도중에 국민당 군 세력 지역에서 잡혀 일을 하게 될 것이라면, 공산당 군에서 일을 시키자고 생각했겠지요이렇게 되돌아보며, 효도 씨는 조용하고 차분하게 말했다.

만주국을 건국하려는 일심에 불타던 소년들이, 실제로는 새로운 중국의 건설을 도왔다는 것이에요. 지금은 오로지 일본과 중국의 공생 공영을 바랄 뿐입니다.

국민당 군과 공산당 군으로 나뉘어져 싸운 사람들은 일본으로 귀국을 한 후에는 같은 입장에 놓였다. 오쿠무라씨의 회상을 들어 보자.

귀국한 다음 날부터 공안 형사가 찾아 왔습니다. 중공(중화 인민 공화국)에서 귀국한 사람이 회사에 있으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고 주위에서 꺼려 취직도 할 수 없었습니다.

아베 요시오씨도 비슷한 처지였을 것이다. 아내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침묵의 깊숙한 한 구석에는 깊은 절망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손자인 다쿠미씨는 그런 할아버지의 생각을 계승하자고 결정했다. 12월 14일에는 스스로 오비린대학에서 개미 병사들의 상영회를 열었다. 영화의 상영이 끝난 후, 오쿠무라씨와 이케타니감독과 함께 3명이 대담을 했다. 다시 한 번 재판을 하자. 오쿠무라씨가 이렇게 결의를 한 것을 보고, 이케타니씨는 다쿠미도 원고의 자격 있어라고 말을 하자, 다쿠미씨는 그렇네요라고 대답을 했다.

젊은이의 힘을 얻어, 오쿠무라씨들의 전쟁은 아직도 계속 될 것이다.

구마모토 신이치(隈)

중국 내전에서 공산당이 이긴 사실은 아시아에 냉전 구조를 성립시켰고 한반도의 내전으로 이어진다. 다음 회에서는 그 이야기를 다루도록 한다.

국공 내전() 중화민국 정부를 이끄는 국민당 군과 공산당 군과의 내전. 1937년부터 시작된 중일 전쟁에서는 일본을 공통의 적으로 싸웠지만, 일본이 패전한 후에는 다시 대립하게 되었다. 1946년 6월부터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국민당이 유리했다. 공산당 군 병력이 120만 명인데 비해, 국민당 군은 430만 명이었다. 이 당시는 훗날의 냉전 시대와는 달라서, 소련도1945년 8월의 중소 우호 동맹 조약을 맺어 국민 정부를 지지했다. 1947년 6월에는 공산당의 거점인 옌안()이 함락되었다.

하지만, 공산당은 동북부(구 만주(満))로부터 공세를 가해, 1948년 9월 이후, 3 대 전역() 전부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랴오선()전역(랴오닝성() 선양()을 중심으로 일어난 동북부 지방의 결전) 화이하이()전역 (쉬저우()를 중심으로 일어난 중위안()의 결전) 핑진()전역(당시는 베이핑()으로 불렸던 베이징()과 톈진()의 결전)이다. 1949년 1월에는 베이징이 무혈 입성하여, 장제스() 국민당 총통이 물러났다. 수도인 난징()도 함락당해, 10월에는 마오쩌둥(沢)이 베이징에서 중화인민 공화국의 수립을 선언했다. 대만(湾)으로 피한 장제스는 1950년 3월, 다시 총통으로 부활해 중화민국을 존속시켰으나, 대륙에서의 지배권은 잃어버렸다.

국민당이 진 이유는 무엇인가. 양쿠이쑹() 베이징대() 교수는 장제스의 전략적 과실을 그 이유로 들었다. 국제 사회가 국민 정부를 중앙 정부로 인정하고 있었으므로, 이를 평화적으로 이용했다면 중국 대륙을 잃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전쟁이 일어나도 간단하게 이길 수 있다고 과신하고 있었지만, 8년간에 걸친 중일 전쟁으로 장병들은 지쳤고 서민들은 국민 정부의 부패와 물가 상승에 분노했다. 농민들 사이에서도 토지를 해방하는 공산당에 대한 지지가 늘어났다. 일본군이 남긴 무기를 소련이 몰래 공산당 군에게 넘긴 것도 컸었다.

해외의 일본인 일본이 패전했을 당시, 해외에 거주하던 일본인은 688만 명으로 간주된다. 이 중 군인이 367만(육군 330만, 해군 37만) 명, 민간 해외 주재의 일본인과 거류민이 321만 명이었다. 패전 직후로부터 4년 후인 1949년 말까지 624만 명이 일본으로 돌아왔다. 해외에 있던 일본인 중 90%가 넘는 사람들이 귀국한 것이다. 나머지 64만 명 중, 도중에 사망한 사람을 제외한 수가 장기 잔류자라는 계산이다.

비교적 잔류자의 수가 많은 것으로 유명한 것은, 중국 동북부(구 만주(満))의 잔류 고아와 부인, 그리고 시베리아 억류자 등을 제외하면, 인도네시아의 독립 전쟁에 몸을 던진 일본군 출신일 것이다. 그 수는 적어도 1천명을 넘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또, 중국에는 120만의 일본군이 남아 있었다. 1946년 5월까지 민간인을 포함하여 166만 명이, 80%를 넘는 사람들이 일본에 귀국했다. 산시성()에 남겨진 일본병사의 예는 이례였다고 할 수 밖에 없다. 가토 요코() 전쟁의 논리외 참조

옌시산()(1883~1960) 중화민국의 군벌의 리더였다. 일본에 유학을 해, 육군 사관학교를 졸업했다. 재일 중에 쑨원()의 중국 동맹회에 들어가, 신해혁명에서 청조와 싸웠다. 1912년 중화민국이 탄생하면서 산시성()의 장이 되어, 그 후에도 오랫동안 권력을 유지하여, 산시왕이라고 불렸다. 1937년에 중일 전쟁이 일어나자, 제2전쟁 지구 사령관이 되었지만, 타이위안()을 일본군에 빼앗기고 산악지대로 후퇴해, 일본군과 국지적인 정전 협정을 체결했다고 전해진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잔류 일본군까지 동원해 공산당 군과 싸웠지만, 1949년의 타이위안이 함락하여 남방으로 도망갔다. 최후는 대만(湾)으로 건너갔다. 국민 정부의 행정 원장(수상)과 국방부장을 역임했다. 만년에는 저술 활동에 전념했으며, 타이베이()에서 사망했다.

지식인 20명에 듣는다--동아시아 근현대사의 10 대 사건은? (14)

리우 지에 ( LIU je) 와세다 대학 교수

일본의 패전으로 아시아는 신시대를

제일 중요한 것은 1945년 일본의 패전이다. 중국 대륙은 그 후 내전을 거쳐서, 공산당 정권에 의한 나라가 성립된다. 일본은 점령 하에서 새로운 민주적 새로운 국가로 다시 태어났다. 식민지였던 한반도와 대만(湾)은 일본으로부터 해방되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동아시아 전체를 볼 때, 하나의 시대가 끝나고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였다. 또한, 원폭 투하에 의해, 세계는 핵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이하는 시간 순으로 2번째로는 청일 전쟁이다. 중화제국으로부터 대만을 획득한 일본의 세계관은 일변했다. 한편, 패배한 중국의 입장에서는 개혁을 본격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많은 유학생들이 일본으로 건너갔고, 현대에 영향을 미치는 개혁파가 역사에 큰 발자국을 남겼다. 일본을 통해서 서양에 배운다, 라는 새로운 중국 대륙의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3번째로는 러일 전쟁이다. 백인 국가에 대한 승리는 태평양 전쟁에 이르는 일본인의 전쟁관과 자아 인식에 결정적 영향을 주었다. 전쟁은 당사자도 아닌 중국에게까지 피해를 입히는 한편, 중국의 내셔널리즘을 자극했다는 측면에서도 중요하다.

4번째는 도쿄()에서의 중국 동맹회 성립이다. 청조(清)를 타도하려는 중국 혁명파들이 최종적으로 도쿄()에 모였다. 1911년에 청조를 넘어뜨린 신해 혁명은 각 지역의 독립을 요구하는 반란이 계기였지만, 1905년에 성립된 동맹회는 훌륭한 목표를 내걸고 있었다. 중국의 새로운 국가 건설의 원점은 여기에 있다. 대륙 침공을 계획하고 있던 일본은 쑨원()이 지도하는 혁명과도 관계가 깊었다. 복잡한 중일 관계의 상징적인 사건이 동맹회의 성립이었다.

5번째는 일본에 의한 한국 병합이다. 일본에게 있어서, 동아시아에서의 제국적인 입장을 확립했다는 것은 큰 의미를 가진다. 한편, 한반도에서는 굴욕적인 역사의 상흔으로 남아 버렸다.

6번째는 대화(対) 21개조의 요구이다. 이 요구로 인해 일본이 직접 얻은 이익은 많은 것이 아니지만, 중국인에게 침략적인 일본이라는 이미지를 심어 버렸다. 이러한 일본 외교의 실패는 중국의 내셔널리즘을 이해하지 못한 것에서 비롯된 것으로, 대부분의 위정자는 그 후에도 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만주(満) 사변과 중일 전쟁을 일으키고 말았다.

7번째로는 만주 사변이다. 단기간에 만주국 건국까지 실현한 군부의 폭주는 쇼와() 전기 일본의 정치 구조를 드러내는 한편, 이른바, 아시아 태평양 전쟁의 출발점이 되었다.

8번째로는 1936년의 시안() 사변이다. 1935년, 36년경의 일본과 중국은 전면 전쟁을 피할 조짐도 있었다. 일본에서는 종래의 고압적 태도를 수정하여 중국의 내셔널리즘을 이해하려는 움직임도 나타났다. 그러나 이는 중국 대륙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에게는 파급 효과가 한정적이어서, 중국의 대일 불신을 불식시키지는 못했다. 시안사변에 의해서 일치 항일()이 중국의 나아갈 방향으로 정착되어, 장제스()는 공산당의 토벌 작전을 중지했다. 중국의 항일 전쟁은 사실상 이 때부터 시작된다. 국공 합작은 공산당이 전국의 통일 정권을 수립하는 첫 걸음이 되었다. 중일 전쟁 전의 이러한 돌발적 사건이 중국과 아시아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

9번째는 조선 전쟁이다. 중국이 참전을 하여 미중 관계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냉전 시대가 시작되어 한반도와 대만(湾) 해협의 분열이 정착해, 동아시아의 구도가 정해졌다. 쇼와()에 일어난 전쟁에 대한 총괄이 미국의 점령 정책 아래에서 조속히 종료되어, 동아시아에 중대한 과제를 남겼다. 전쟁으로 일본은 경제 성장의 전기를 맞이한다.

마지막으로는 중국의 개혁과 개방이다. 1949년 이후 중국의 재건은 1980년대부터 개혁과 개방으로 본격화된다. 중국의 대두는 냉전 후, 미국의 세계 전략과 세계의 정치 경제 질서에 근본적인 변혁을 가져왔다. 동아시아의 미래는 중국이 나아가는 방향에 달려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인터뷰:사토 가즈오()

약력

리우 지에(). 1962년 베이징() 생. 근대 일본 정치 외교사, 동아시아 국제 관계사. 대표적인 저서로 중일 전쟁 하의 외교, 중국인의 역사관등이 있다.

리스트

원폭 투하에 의한 일본의 패전과 국공 내전의 종결

청일 전쟁

러일 전쟁

도쿄에서의 중국 동맹회 성립

한국 병합

대화(対) 21개조의 요구

만주 사변

시안 사변

조선 전쟁

중국의 개혁과 개방

제7장 아시아• 태평양전쟁과 국공 내전(国内戦)

기억을 만드는 것

전쟁 박물관

전쟁사와 어떻게 마주 할 것인가

과거 사건들을 어떤 형태로 기억에 남길 것인가. 박물관이라는 장치가 짊어진 영원한 과제는 전쟁이 주제가 되면 한층 더 어려워진다.

공적인 기억이 아직 없는 일본

구슬을 꿰맞춘 것처럼 계속 이어진 것은 아니지만, 근대 일본은 1945년 패전을 맞을 때까지 끊임없이 전쟁을 해 왔다. 1931년 만주 사변을 시작으로 15년 전쟁이라 부르는 사람도 있다.

이러한 전쟁들을, 통사로서 전시하는 국립 박물관이 일본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일본에서 유일한 국립 역사 박물관은 지바()현 사쿠라()시에 있는 국립 역사 민속 박물관이다. 그러나 전시는 고대에서부터 1920년대까지로, 그 이후를 어떻게 전시할 것인가가 1983년 개관 이래의 현안이다. 일본의 정치가 이웃 여러 나라와의 역사 문제로 흔들려 온 것과도 관계가 없는 것은 아니다.

원래 박물관 개관 시기에 일본은 역사 교과서 문제로, 중한() 양국과 심각한 상황에 있었다. 그 후에도, 아시아 태평양 전쟁의 의미를 둘러싸고 일본 내 정계에서도 대외적으로도 마찰이 끊이질 않았으므로, 역사 민속 박물관이 수수방관한 것은 당연하다 할 것이다. 왜냐하면 국립 박물관이기 때문에 박물관의 전시는 곧 일본의 정사()라고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특별전의 시도는 있었다. 작년에는사쿠라 연대()로 보는 전쟁 시대라는 전시가 열렸다. 그 지역에 있었던 부대의 이야기인 만큼 많은 사람들이 방문해 서로 의견을 주고받으며 새로운 역사자료를 제공해 주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연대사()라는 설정은 전쟁의 전체상을 보여주지 못 했다는 한계도 드러냈다. 연대가 참가한 청일 전쟁과 러일 전쟁으로부터 태평양 전쟁 말기의 필리핀 레이테섬에 이르기까지, 그렇다면 왜이런 전쟁이 일어났는가라는 전체 상황에 대한 의문 그대로 남게 되었다.

국립 시설로는 또 한군데 도쿄() 구단()에 쇼와관()이 있다. 전시 중과 전후의 어려웠던 국민 생활을 후세대에 전한다라는 목적으로, 당시의 생활을 전하는 역사 자료들이 많이 전시되어 있다. 그것은 그 나름대로 흥미로운 전시품들이지만, 그러한 생활을 초래한, 즉 전쟁 그 자체에 관해서는 거의 아무것도 다루지 않고 있다.

역사 민속 박물관도 쇼와관도, 그 전쟁에 대해 아직도 일본이 공적 기억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을 갖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 준다. 자치단체나 민간 역사 관련 시설에서는 다양한 시도도 하지만, 국립이 되면 누구 봐도 불만을 이야기 하지 않을 후방의 노고에 안주할 수밖에 없다.

야스쿠니 신사에 있는 유취관()은 훌륭한 전쟁 박물관이지만, 그 전쟁은 일본의 자존 자위를 위해서였다는 주장을 관철하고 있다. 지금은 종교법인의 부속 시설임에도 불구하고, 해외에서는 일본의 전쟁관을 대표하는 곳이라고 보는 경향도 있다. 하지만, 일본은 이 곳을 대신할 만한 국가 시설을 갖지 않고 있다.

한국과 중국은 정치성을 선명하게

중국과 한국은 일본과는 대조적으로, 일단 일본이 관계되는 전쟁에 대해서는 이 이상은 없다 할 정도로 확실한 전시를 하고 있다. 잘못은 전면적으로 일본에 있으며, 그 부도덕한 침략과 식민지 지배에 대한 정의의 싸움이었다고 망설임이 없이 묘사를 한다. 베이징() 교외의 중국 인민 항일 전쟁 기념관이 그 상징으로, 일본의 폭거에 대항하는 공산당의 싸움을 칭찬하는데 전력을 쏟고 있다.

한국의 독립 기념관은 일본 지배의 가혹함을 디오라마 등을 사용하여 상설 전시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개관 20주년인 현재는 특별전 일제 침략기 고문 체험전도 옥외에서 열고 있다. 등신대의 인형을 사용한 생생한 전시이지만, 김삼웅() 관장은 역사적 사실이며, 과장도 왜소화도 하지 않았다라고 강조한다.

대부분의 일본 국민은 온화하며 신사적이라고 생각하지만, 과연 정치가도 그러한가, 야스쿠니 참배도 그렇고 독도 문제만 하더라도라며 김 관장은 뿌리 깊은 불신감을 말했다. 그 불신감을 그대로 옮기기라도 한 듯 한 전시는 박물관의 정치성을 뚜렷하게 표현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전쟁하면 우선적으로 조선 전쟁을 떠올린다. 거기에 대부분을 할애하는 곳이 전쟁 기념관이다. 권영효(権) 관장은 전쟁은 언제라도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직시해야 한다. 전쟁의 비극에 대해서도 전해야 하므로, 균형 있는 전시를 하기 위해 노력한다라고 말했다. 국방 의식을 고무하며 한편으로는 전쟁의 비참함을 강조해야 하니, 극히 어려운 일임에 틀림없다.

역사 기념 시설에 대한 저작을 가지고 있는 정호기(滈) 성공회대 교수는, 한국에서도 전쟁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에 대해 충분히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고 말한다. 독립을 되찾기까지의 전쟁은 그렇다하더라도, 조선 전쟁, 베트남 전쟁에 대해서는 국내에서도 여러 논의가 있다고 한다.

한국 전쟁에서 희생된 민간인에 대해서는 긴 시간 주목하지 않은 채 방치된 상태였다. 베트남 전쟁에서는 한국군이 공산화를 막는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지만, 과연 그러한가. 참전한 사람들의 괴로움과 그에 대한 보상은 무엇이었는가라는 의문이 제기 되고 있다.

국립 기념관은 군사 정권 하에서 계획된 것이라며 비판하는 정() 교수는, 전쟁의 기억을 다른 형태로 전하는 평화 박물관구상을 대학 관계자 및 시민 단체와 추진하고 있다.

역사 박물관 20 세기를 되돌아 보는 전시로

이야기를 역사 민속 박물관으로 되돌려 보자.

그 전쟁을 포함한 쇼와기의 상설 전시에 대한 검토가 시작되었다. 만주(満) 사변으로부터 1970년대 고도 성장기까지를 상정하여, 2년 후의 봄에 개설할 것을 목표로 한다.

역사 민속 박물관의 야스다 쓰네오( ) 교수는, 그 전쟁은 과연 무엇이었는가에 대해 다시 생각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일본이라는 일국의 역사를 넘어서서 현대란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또한 20세기란 어떤 시대이었던가를 생각하는 전시, 그러므로 전쟁 전시라고 하는 것보다는 현대 전시가 될 것이라고 말한다.

야스다() 씨는 올해 3월, 베를린에서 열린 각 국 역사 박물관 관계자들이 모이는 심포지엄에 참가했다. 어느 나라도 한결같이 미술관으로서의 박물관으로부터 어떻게 탈피하여, 역사와 어떤 식으로 마주 할 것인가에 대해 열심히 추구하는 모습이 인상 깊었다고 말한다. 캐나다와 오스트레일리아 박물관의 키워드는 다문화였고, 프랑스는 이민, 폴란드는 자유를 키워드로 삼는다는 이야기를 듣고, 박물관이 할 수 있는 지향할 목표를 찾았다는 생각한다.

물론 주제가 전쟁이 되면 구미있어서도 깔끔하게 정리되는 것은 아니다. 미국은 국내에서 베트남 전쟁에 대한 논란이 끊이지 않으며, 원폭 투하와 관계되는 전시에서는 일본과의 사이에 격렬한 마찰이 존재한다.

그런데도, 예를 들면 유럽에서 홀로코스트에 평가가 어떻게 모아지고 있는지를 보면, 그리고 착실하게 진행되는 유럽 통합의 움직임을 보면, 동아시아의 지금을 다시 생각해 보지 않을 수는 없다. 베를린의 유태 박물관과 같이 고도로 추상화 된 표현이 가능한 것도, 홀로코스트를 둘러싸고 독일의 정치적 타협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미래의 전시를 향해서 야스다() 씨는 말한다.

다양한 해석 및 다의성을 소중히 하고 싶다. 해답을 제시하는 전시가 아닌, 물음을 이끌어내는 전시를 지향하겠다

정치적 성가심으로부터 도망가기 위한 술책이라고 폄하하면 간단 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전쟁, 더 나아가 역사를 전시하는 것은, 보는 측에도 지력과 체력이 필요하다. 상호 작용으로 어떠한 공적 기억에 도달하려 하는가. 정치에 맡기는 것만이 정사()는 아니다.

후쿠다 히로키()

전쟁 박물관 일반적으로 전쟁과 군사에 대해 전시한 박물관을 가리키지만, 군사 박물관이나 전쟁 자료관, 평화 박물관 등 호칭은 여러 가지가 있다. 영국의 제국 전쟁 박물관, 폴란드의 아우슈비츠 박물관, 오스트레일리아의 전쟁 기념관 등 많은 나라가 국립 전시 시설을 갖고 있다. 미국에는 히로시마에 원폭을 투하한 폭격기 에노라 게이의 전시가, 국내외적으로 논쟁을 일으킨 국립 스미소니언 항공 우주 박물관 등이 있다. 동아시아에는 베이징() 교외의 중국 인민 항일 전쟁 기념관과 한국의 전쟁 기념관 등이 유명하다. 일본에는 오키나와현(縄県)의 평화 기념() 자료관과 히메유리 평화 기원 자료관, 히로시마(広) 평화 기념 자료관, 나가사키() 원폭 자료관, 도쿄() 대공습•전재戦 자료 센터 외에도, 전국의 지방 단위에 전시릏 하거나 연구를 하는 크고 작은 시설들이 있어, 각지의 피해 기록과 전쟁 체험을 전하고, 전쟁과 평화를 생각하는 행사 등을 기획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