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유레카’ 속 회복의 풍경
버스 인질극에서 살아남은 세 사람을 그린 아오야마 신지 감독의 영화 ‘유레카’. 사진 출처 IMDb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마을버스 한 대가 유유히 자기 갈 길을 가고 있다. 운전사 사와이가 맨 앞자리, 승객 몇 명이 중간, 그리고 나오키 남매가 맨 뒷자리에 앉아 있다. 오빠 나오키는 나른하게 만화책을 펴 든다. 누이동생 코즈에가 함께 보려고 고개를 들이밀지만, 나오키는 아랑곳하지 않고 혼자 만화책을 읽는다. 이상한 일이라고는 일어나지 않은 그저 평범한 일상의 순간. 그 순간을 지날 때는 그것이 행복인 줄 모르지만, 돌이켜봤을 때는 그야말로 진정한 행복이었다고 기억하게 되는 순간, 바로 그때 운전사와 승객들은 예상치 못한, 그러나 다시는 그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경험을 하게 된다.
버스 인질극에서 살아남은 세 사람을 그린 아오야마 신지 감독의 영화 ‘유레카’. 사진 출처 IM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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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대체 왜 인질극을 벌인 것일까. 이 모호함은 생존자들에게 오히려 더 깊은 정신적 상흔을 남기는 것 같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라고 했다면 소녀 코즈에는 사회 정의를 위해 싸우는 사람이 되었을지언정, “커다란 쓰나미가 온다. 언젠가 반드시, 모두 없어질 것이다”라고 독백을 하는 사람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맑은 공기를 마시겠다고 버스 밖으로 나간 범인은 경찰의 총에 맞아 죽었다. 자, 위기는 진정됐고 일상은 회복됐다. 단, 그때 버스에 탔던 승객들은 예외다. 모두 죽었고, 운전사 사와이와 나오키 남매만 살아남았다. 세 사람은 그전처럼 살아갈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3시간 38분에 이르는 러닝타임 대부분이 이 세 사람이 이 끔찍한 경험을 이고서 어떻게 삶을 견디는지 보여주는 데 할애된다. 그들은 과연 자신이 있던 일상 속으로 돌아갈 수 있었을까.
이 세 사람은 원래의 삶을 복구하는 데 차곡차곡 실패한다. 그것은 그야말로 예상치 못한, 그러나 다시는 그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경험이었던 것이다. 운전사 사와이는 고향을 떠나 2년 동안 이곳저곳을 전전했으며 살인사건 용의자로 몰리기도 했고, 그의 가정은 결국 파괴됐다. 나오키 남매는 세간의 관심에 시달리다가 실어증에 걸렸고, 어머니는 아버지의 가정폭력을 피해 집을 떠났다. 남겨진 아버지는 죽었고, 친척들은 아버지의 사망보험금을 노린다. 결정적으로 세 사람 모두 그 인질 사건으로부터 정신이 자유롭지 못하다. 마침내 사와이가 제안한다. 자, 떠나자.
그때부터 이 영화는 로드무비가 된다. 그들의 여행은 그 결정적 체험의 역사를 다시 쓰는 행위다. 그 사건의 현장으로 다시 돌아간다. 바로 그 지점에서 사와이는 버스를 몰고 집으로 가는 대신 바다로 향한다. 바다로 향하는 여행이라니, 너무 진부하지 않냐고? 그러나 종착지가 집이 아니라 바다여야 할 이유가 있다. 그들이 집으로 향하지 않는 이유는 이미 일어난 일을 없던 것으로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마치 깨진 그릇을 원상태로 돌릴 수 없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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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쓰기는 도자기의 깨진 틈을 옻칠과 금으로 이어 붙여 예술로 승화시키는 일본의 전통 수리 공예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바다로 떠난다고 모두가 트라우마를 치유하는가. 그렇지 않다. 바다로 가는 여정에서 오빠 나오키는 여전히 살인의 망령에 사로잡힌 것으로 판명되는 한편, 누이동생 코즈에는 폴라로이드 사진기로 생존자들을 찍는다. 그렇게 찍음으로써 벌어진 사태를 재현하고, 그 재현을 통해 그 압도적 사태는 객관화된다. 그리하여 바다에 도착했을 때, 코즈에는 마침내 거대한 시야를 얻는다. 그 시야를 반영하듯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주인공들을 사소하게 만드는 광활한 풍경의 모습이다. 그 장면은 아마도 헬기에서 찍었겠지만, 그것은 해방된 이를 바라보는 시선이 아니라 해방된 이의 시선이다. 그 시선 속에서 그 압도적 경험은 비로소 사소한 제자리를 찾는다. 2000년에 만들어져 개봉한 ‘유레카’는 21세기를 여는 영화였다. 21세기의 4분의 1이 지난 지금 한국에서 재개봉했으나, 이 영화는 여전히 현재형으로 보인다.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