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능과 공작은 달라, 부정선거론 선 그어야 소수의 표 위해 나머지 표 무효? 비현실적 무결한 선거 자체가 목적이 되는 것 경계해야 찾아야할 것은 선거라는 제도에 대한 신뢰
박원호 객원논설위원·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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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에 대한 공부를 평생의 업으로 삼은 내게도 6·3 지방선거 투표용지 부족 사태는 처음 들어본 황당한 사건이었다. 이로 인해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진상조사위원회를 출범시켰고, 국회가 국정조사를 진행할 예정이라 하니 결코 간단히 끝날 사안은 아니다. 무엇보다 재선거 요구를 포함한 항의의 목소리가 계속 이어지고 있으며, 이는 우리 공동체가 함께 숙고해야 할 과제다.
먼저 필요한 것은 누구나 동의하는 부분과 의견이 갈리는 부분이 무엇인지 구분하는 일이다. 예컨대 기표할 투표용지가 모자랐다는 사실에 분노하지 않을 국민은 없을 것이다. 이런 일이 왜 벌어졌는지 규명하고, 책임 있는 사람에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데에도 누구나 동의할 것이다. 즉, 시간이 걸리더라도 철저한 진상 규명과 재발 방지가 필요하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
이번 투표용지 부족 사태가 누군가에 의해 의도적으로 기획·실행된 결과이며, 따라서 이번 선거 자체가 부정선거라는 견해도 있는 것으로 안다. 그러나 부정선거를 성공적으로 실행하기 위해 투표용지를 굳이 부족하게 인쇄했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주장이다. 초기 시위에 참여했던 이들은 이런 부정선거론과는 명백한 선을 긋고 싶어 했다. 그런 의미에서 지난 선거가 무능과 안일 행정의 결과였을망정 부정선거는 아니었다는 데 많은 사람들이 동의할 것으로 생각한다. 물론 선거에 관한 의혹 제기 자체가 금기일 수는 없다. 그러나 부정선거라는 말은 국가의 기본 신뢰를 흔드는 매우 무거운 주장이며, 분노나 정황이 아닌 명백하고 구체적인 증거 위에서만 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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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각에선 투표용지 부족이 선거 결과에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혹은 영향을 미치지 못한 선거구에서도 재선거를 해야 한다는 주장도 내놓는다. 예컨대 ‘전국 재선거’, 혹은 ‘서울시장 재선거’를 진행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우리는 여기에 동의할 수 있을까.
이들의 논지를 나름 이해해 보자면 다음과 같다. 투표용지 부족이 선거 결과에 영향을 미치지 못했더라도 절차와 과정이 훼손됐기 때문에 재선거가 불가피하다는 주장이다. 여기에 더해 출구조사와 심지어 상당한 개표 결과가 발표되고 난 다음에 투표한 사람도 있기 때문에 공정성이 심하게 훼손됐다는 점을 강조하는 주장도 있다. 인쇄가 잘못된 시험지를 받은 학생이 1명이라도 있으면 재시험을 치르는 것이 맞지 않느냐는 비유도 봤다.
이상과 같이 ‘규범주의’라 부를 만한 주장을 존중할 수는 있으나 동의하기는 어렵다. 선거가 민주주의의 꽃일 수는 있어도, 그 자체가 목적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우리 정치사가 한국 유권자들에게 선거의 완전무결성에 대한 노이로제를 남긴 것을 이해하지만, 결국 선거는 승자를 선출하고 정부를 구성하는 정치의 출발점에 불과한 것이 아니었던가.
선거에 참여하는 후보와 유권자들이 맺는 가장 중요한 약속은 게임의 규칙을 따르겠다는 합의다. 다시 말해 내가 상대방보다 한 표라도 덜 얻게 된다면, 혹은 내가 지지하는 후보가 상대방보다 한 표라도 덜 얻게 된다면 나는 당분간은 상대방 중심의 정치 질서를 승복하고 인정하겠다는 무언의 약속이 아니었던가. 왜냐하면 그것이 총칼의 대립보다는 훨씬 낫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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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동의하는 바가 또 있다. 선거에 대한 신뢰는 민주주의를 떠받치는 마지막 기둥이라는 사실이다. 그렇기에 지금 필요한 것은 분노의 확산이 아니라 진실의 규명이고, 의혹의 증폭이 아니라 책임의 확인이며, 정치적 구호가 아니라 제도의 복원이다. 민주주의는 흠이 없어서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 잘못을 바로잡을 수 있다는 믿음 속에서 유지된다. 결국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한 번의 선거를 넘어, 선거로 함께 살아갈 수 있다는 공동체의 신뢰 그 자체가 아니었던가.
박원호 객원논설위원·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