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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영 스타트업 투자심사역(VC)·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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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다이어리 맨 뒷장에 버킷리스트를 쓴다. 십수 년간 그 목록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한 것 중 하나가 ‘소믈리에 자격증 따기’였다.
처음으로 독립해 살던 사회 초년생 시절,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취향을 탐닉할 자유가 생겼다. 서툰 칼질로 파스타를 만들고 스테이크도 굽고 편의점에서 싸구려 와인도 사다 마셨다. 자연히 와인이라는 세계에 관심을 갖게 됐고, 이런저런 책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마치 외국어를 처음 배울 때처럼 라벨에서 안 보이던 글자가 보이고, 느끼지 못하던 맛이 느껴질 때의 쾌감이 좋았다.
결혼을 하고 연차가 차면서 더 비싸고 좋은 와인을 접할 기회는 많아졌지만, 그 시절만큼 시간과 마음을 할애할 여유는 없었다. 언젠가는 제대로 공부해 보고 싶다는 생각에 매년 버킷리스트에 올려놓기는 했지만 가능한 일이라 생각하진 않았다. 비싼 수업료도 수업료지만 상당 기간 매주 일정한 시간을 확보하는 것이 전처럼 쉽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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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첫 수업일,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강의실을 찾았다. 시음 전용 와인잔 세트와 교재를 받아 들고 맨 앞줄에 앉았다. 옆 짝꿍 자리를 맡는 것도 잊지 않았다. 뒤이어 와인잔 세트와 교재를 품에 안은 그가 잔뜩 흥분한 얼굴로 내 옆에 와 앉았다. 우리는 마치 신학기를 맞은 학생들 같았다.
오랜만의 필기에 손가락이 얼얼했다. 수업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낯선 용어에 지리까지, 외울 것이 산더미였다. 그런데 그게 스트레스 받기는커녕 신이 났다. 업무 특성상, 인공지능(AI) 시대의 흐름상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배워야 하는 것이 최근 들어 버거웠다. 나이가 들었고, 호기심도 체력도 전과 같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날 깨달았다. 내가 지쳤던 것은 배움 자체가 아니라 ‘생존을 위한 배움’이었다는 것을.
수업을 마치고 수강생들이 돌아가며 자기 소개를 했다. 와인숍을 운영하는 사람, 레스토랑 오픈을 앞두고 있는 사람도 있었지만 우리처럼 그저 공부를 해보고 싶었던 이들도 적지 않았다. 목적은 제각각이었지만, 모두의 얼굴에 가벼운 흥분이 서려 있었다. 무언가 새로운 세계의 문을 열고 들어서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설렘과 활력. 내게는 그것이 그렇게 읽혔다.
집에 돌아와 못다 쓴 보고서 앞에 앉았다. 숫자들은 여전히 머리를 아프게 했지만, 전과는 다른 에너지가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문득 다이어리를 펼쳐 버킷리스트에서 ‘소믈리에 자격증 따기’를 지웠다. 합격, 불합격 여부는 이미 중요하지 않았다. 멈춰 있던 호기심의 시계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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