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조원대 국부 걸고 싸우는 ‘정부 변호사’의 24시 론스타-쉰들러-엘리엇 사건 등 국제 소송서 4연승 전세계 상대…하루 4시간 자며 24시간 업무 모드 키맨 돌연 출국불가-4000억 공탁 등 아찔한 순간도 “지면 강물에 뛰어들자” 각오, 국제전쟁 ‘한국 대리인’으로
더뎁스(The Depth)는 사건과 사고 뒤에 숨겨진 입체적인 맥락을 파헤치는 시리즈입니다. 현장의 소음에 가려진 핵심 쟁점을 파고들어 ‘왜’와 ‘어떻게’를 선보이겠습니다.
“전부 승소입니다!”
3월 14일 오전 2시 3분 정부과천청사. 적막한 사무실 안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컴퓨터 모니터 화면에 국제상설중재재판소(PCA)의 영문 판정문을 띄워놓고 바라보던 법무부 양준열 검사(사법연수원 43기)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스위스 엘리베이터 업체인 쉰들러 홀딩 아게사가 한국 정부를 상대로 낸 3250억여 원대 국제투자분쟁(ISDS)에서 정부가 전부 승소한 순간이었다.
‘쉰들러 사건’ 대응 팀장을 맡았던 법무부 국제법무국 국제투자분쟁과의 양 검사를 최근 법무부 청사에서 만났다. 그는 “상대방이 주장하는 정경유착 프레임을 깨는 것이 중요했고, 양측 공방도 치열하게 이뤄졌던 사안”이라며 “판정문이 언제 이메일로 도착할지 몰라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고 승소 순간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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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엇 사건’ 대응 팀장을 맡았던 법무부 국제법무국 국제투자분쟁과의 민경원 검사(왼쪽)와 ‘론스타 사건’과 ‘쉰들러 사건’, ‘중국투자자 사건’ 팀장을 맡았던 양준열 검사(오른쪽). 과천=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4시간이 모자란 정부 변호사
이처럼 외국 기업이나 사모펀드들이 우리 정부를 상대로 “차별적 규제 때문에 손해를 입었다”는 이유로 ISDS를 제기하는 일이 적지 않다. 국제투자분쟁과 검사와 변호사, 공익법무관 등 공직자 13명은 이런 소송을 전담해 대응하는 ‘정부 변호사’ 역할을 하고 있다. 많게는 수조 원 규모 국부 유출을 방어해야 하는 소송인 만큼 정부는 중재 절차를 수행할 국내외 로펌도 선임한다. 하지만 장기간에 걸친 소송을 총괄하고 전략을 짜는 ‘컨트롤 타워’ 역할을 법무부 공직자들이 맡고 있다.
이곳에서 근무하는 검사와, 사무관, 법무관, 전문위원 등은 한국뿐 아니라 중재지인 영국이나 미국, 네덜란드 등 다양한 국가 시간에 맞춰 사실상 ‘24시간 업무 모드’ 상태인 경우가 많다. 우선 법무부 소속 공직자인 만큼 평일 오전 9시경 출근해 각종 업무를 본다. 이후 중재지 시차를 고려해 밤늦은 시각부터 새벽까지 회의를 이어가는 일이 잦다.
2024년 12월 3일 비상계엄 선포 당일에도 양 검사는 론스타 판정 취소 절차에 제출할 수백 쪽짜리 영문 서면을 검토했다. 자정 무렵부터 “청사가 폐쇄될 수 있다” “괜찮느냐”는 연락이 잇따랐지만 새벽 5시까지 서면 검토를 마친 뒤 귀가했다. 양 검사는 “평균 수면 시간은 하루 4시간 내외이고 일주일에 거의 하루도 빼놓지 않고 새벽에 퇴근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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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DS 사건 대응은 과거 정부 처분을 둘러싼 사실관계를 정확히 확인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해외 기업들이 차별적이고 부당하다고 주장하는 우리 정부 처분이 어떻게 이뤄진 것인지 판단 과정을 되짚어 보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처분을 내렸던 기관들이 방어적 태도를 보이는 경우도 적지 않다.
‘엘리엇 사건’ 팀장을 맡았던 민경원 검사(연수원 42기)는 “주로 처분을 내린 정부 기관에 가서 많은 기록을 뒤진 뒤 유의미한 증거를 찾는데, 검사의 수사 업무와 비슷하다”며 “(증언을 해줄 사람들이) 퇴직한 분일 때도 있고, 상대방 측 반대신문에도 대비해야 하는 만큼 증인신문 준비 과정이 어려운 면이 있다”고 했다.
검사들이 ‘키맨’인 증인을 설득하더라도 막상 증언을 앞두고 예기치 못한 상황이 발생한 일도 있었다.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쉰들러 사건 구술 심리가 예정된 가운데 함께 현지로 향하기로 했던 핵심 증인이 급격한 건강 악화로 출국할 수 없게 됐다고 전해온 것이었다. 양 검사는 “절체절명의 위기였다”며 “서면 공방 끝에 중재판정부로부터 화상 신문 허가를 받아냈고 온라인 화상 증인 신문 방식으로 무사히 절차를 마쳤다”고 했다.
국제투자분쟁 사건에선 대부분 외국인인 중재판정부에 국민연금처럼 한국에만 있는 고유한 기관에 대해 효과적으로 설명하는 것도 승패를 가르는 관건이 된다. 올 2월 정부는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과 관련해 한국 정부가 미국계 사모펀드 엘리엇 측에 1600억 원을 배상해야 한다는 기존 판정 결과를 취소해달라”고 영국 상사법원에 낸 소송에서 승소했다. 이때 영국 법원은 합병에 찬성표를 던졌던 국민연금에 대해 “사실상(de facto) 국가기관이라고 규정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한국 정부가 엘리엇 측에 1600억여 원을 배상해야 한다는 판정 결과가 일부 취소됐고, 다시 한번 배상 책임을 다툴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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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 수조 원 국부 건 소송에 심리적 부담감도
13년에 걸친 론스타와 공방 과정에선 아찔했던 순간도 적지 않았다. 론스타가 2022년 8월 국제투자분쟁해결센터(ICSID)에서 “한국 정부가 2억1650만 달러를 배상하라”는 승소 판정을 받았는데 이후 미국 법원에 “배상금을 강제 집행해달라”는 추가 소송을 냈던 것. 우리 정부가 자칫 4000억여 원 가까운 배상금을 지급보증하거나, 법원에 공탁해야 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양 검사는 “수천억 예산이 갑자기 어디서 나올 리 없어 모두가 패닉 상태였다”며 “치열한 서면공방과 구두변론 끝에 보증이나 공탁 없이 판정 집행을 차단했다”고 했다.
이후 론스타 사건 대응팀은 “한국 정부의 배상 책임을 인정한 기존 판정은 적법절차를 위반한 것”이라는 점을 부각하는 전략을 전면에 내세웠고, 결국 미 워싱턴DC 국제투자분쟁해결센터(ICSID)의 론스타취소위원회에서 승소 결정을 선고받았다. 영국 런던에서 열린 구술심리 도중 취소위원회 위원장은 “기존 판정이 적법절차를 위반한 것이라는 주장이 받아들여지면 나머지 취소 사유는 더 판단할 필요가 있는가”라고 물었다. 양 검사는 “ICSID 역사상 취소 신청이 전부 인용된 건 1.6% 뿐”이라며 “승소를 예감하고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고 했다.
수조 원의 국부가 걸린 법정 공방을 담당하는 만큼 국제투자분쟁과 팀원들의 심리적 부담감도 만만치 않다. 민 검사는 “영국 법원의 취소 인용률은 3%로 우리가 이길 확률이 극단적으로 낮은 상황이었다”며 “팀원들끼리 우스개소리로 ‘내일 지면 템스강에 뛰어들자’고 얘기하기도 했다”고 회상했다. 민 검사는 이어 “질 것 같다고 생각하면 포기할 것 같고, 이길 것 같다고 생각하면 소홀해질 것 같아 당면한 과제부터 최선을 다해 처리하려고 마음 먹었다”고 말했다.
‘론스타 사건’과 ‘쉰들러 사건’, ‘중국투자자 사건’ 팀장을 맡았던 양준열 검사(왼쪽)와 ‘엘리엇 사건’ 대응 팀장을 맡았던 법무부 국제법무국 국제투자분쟁과의 민경원 검사(오른쪽). 과천=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상대방 6분의 1 수준 법률 비용으로 승소
수백억대 법률 비용을 들여 소송에 대응하는 해외 기업이나 사모펀드들과 달리 법무부는 한정된 예산 범위 안에서 대응해야 한다는 한계도 있다. 그럼에도 법무부는 최근 ‘엘리엇 사건’에서 상대측의 6분의 1밖에 안 되는 비용으로 기존 판정을 뒤집는 결과를 이끌어냈다. 론스타와 쉰들러, 중국투자자 사건 등에선 연이은 승소 판정은 물론 219억여 원의 소송비용까지 상대측으로부터 돌려받는 결정을 받아냈다. 양 검사는 “예산 부족 때문에 로펌에 보수 지급이 밀렸고 조금 기다려달라고 읍소하면서 중재절차를 수행했다”며 “법무부가 서면 초안을 먼저 작성해 로펌에 크로스체크를 의뢰하는 식으로 로펌의 타임차지(시간당 청구)를 줄이기도 한다”고 했다.
외국인의 국내 투자가 늘어나면서 한국 정부를 상대로 한 ISDS 사건이 점차 늘어나는 만큼 국제중재 분야에 전문성 있는 전담 검사를 양성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국제투자분쟁 대상이 된 처분을 내린 처분청이 관련 자료를 보존·제출하거나 관련 예산을 편성·집행토록 하는 ‘국제투자분쟁의 예방 및 대응에 관한 법률안’도 국회에 계류돼 있다. 민 검사는 “지금은 최초 처분을 내린 정부기관(처분청)을 설득하는데 많은 에너지와 시간을 쓰고 있지만 진짜 다퉈야 할 대상은 바깥에 있다”며 “처분청에서 예산을 부담할 때 ISDS로 인한 예방 효과도 발생할 수 있다”고 했다.
장기적으로는 미국의 국제분쟁대응실처럼 전문 인력 수백 명이 ISDS 사건을 담당할 수 있도록 별도 조직을 갖추는 게 목표다. 양 검사는 “국제 전쟁과 다름없는 ISDS에서 검사는 수조 원 국부를 지켜야 하는 대한민국 대리인(RC·Republic of Korea‘s Counsel)”이라며 “이준 열사가 순국한 헤이그에서 쉰들러 사건을 이겼을 때 감명 깊었고, 그 정신을 이어받아 국부와 정당한 규제 주권을 끝까지 보호하겠다고 다짐하게 됐다”고 말했다.
과천=고도예 기자 ye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