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사진 No.165
● 환하게 웃는 북한의 농민 사진
사진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들 합니다. 맞는 말이기도 하고 틀린 말이기도 합니다. 사진자체는 거짓말을 하지 않지만, 무엇을 보여주고 무엇을 가릴지 결정하는 권력이 늘 사진 바깥에 있는 사회도 있습니다.
이번 주 북한 노동신문 모내기 사진을 보다가, 어 뭔가 달라졌네 싶어서 자료를 찾아봤습니다. 농민의 얼굴이 다시 화면 안으로 들어왔고 표정도 훨씬 또렷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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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은 19일 “각지에서 풍년모내기가 한창”이라며 강남군 장교농장을 조명했다. (평양 노동신문=뉴스1)
5월 19일자 북한 노동신문은 “각지에서 풍년모내기가 한창”이라며 8장의 사진을 실었습니다(실제 지면을 본 게 아니고 인터넷으로 사진을 체크해서 정확하게 8장이 아닐 수는 있습니다). 이 가운데 눈에 띄는 것은 농민의 얼굴이 예전보다 훨씬 가까이 잡혔다는 점입니다. 북한의 농촌 사진이 대체로 넓은 논과 집단의 동작을 보여주는 구도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번 변화는 의미가 있습니다.
● 1950년대 — 클로즈업의 시대
북한 사진이 처음부터 이렇지는 않았습니다. 1950년대 중후반 노동신문 사진을 보면 깜짝 놀랍니다. 농민의 얼굴이 화면 가득 들어오는 과감한 클로즈업, 손에 잡힌 모를 쥔 손가락의 디테일, 땀이 맺힌 이마. 사회주의 리얼리즘 회화의 영향이 강하던 시기였고, 소련의 사진 미학이 거의 그대로 이식되던 때였습니다. 인간이 사진의 주인공이었고, 인민의 노동 자체가 주제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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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신문 1966년 6월 8일에 실린 사진. 농민이 화면의 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 1967년 이후— 사진의 문법이 바뀌다
그러다 1967년이 옵니다. 조선노동당 4기 15차 전원회의에서 김일성 유일사상체계가 확립된 해입니다. 북한 사회 전체가 수령제 사회주의로 재편되던 시기인데, 흥미롭게도 이때 사진의 시각 문법도 통째로 바뀝니다.
노동신문 1997년 5월 11일자
● 2018년 — ‘동원의 풍경’이 표준이던 시절
불과 8년 전인 2018년 5월 22일 노동신문 모내기 사진을 보겠습니다. 논두렁을 따라 선전 음악을 틀어놨을 트럭의 스피커 앞에서 두 대의 이앙기가 작업 중입니다. 멀리 붉은 구호판도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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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신문 2018년 5월 22일자.
그런데 올해 2026년 5월 노동신문 모내기 사진들을 정리해 보면 패턴이 또렷합니다. 선동대 행렬이 사라졌습니다. 깃발 든 사람들이 줄지어 선 구도가 빠졌습니다. 대신 이앙기 운전석의 농민 얼굴이 클로즈업으로 잡힙니다. 강선농장 사진에서는 한 청년이 환하게 웃으며 이앙기 핸들을 잡고 있고, 강남군 장교농장 사진에서는 두 농민이 모판을 주고받으며 마주 웃습니다. 수십 년간 작은 점이었던 인간이, 다시 사진의 주인공으로 돌아왔습니다.
● 변화의 배경 — 농업 기계화 강조
이 변화의 배경으로는 최근 북한이 강조해 온 농업 기계화 정책을 들 수 있습니다. 김정은은 2024년 1월 농기계 전시회를 참관하며 농업 기계화의 질적 수준 향상과 기술적 발전을 강조한 바 있습니다. 북한 매체들도 새 시대 농촌강령의 실현과 농기계 공업의 발전을 자주 부각하고 있습니다.
이런 흐름을 보면 북한이 보여주고 싶은 새 농촌의 이미지는 “동원된 인민의 정신력으로 농사를 짓는 풍경”보다는 “기계화된 현대 농촌”에 가깝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이미지를 설득력있게 전달하려면 과거에는 카메라에서 멀리 밀어냈던 농민의 얼굴을 다시 가까이 데려올 필요가 있었을 것입니다.
● 사진과 현실 사이
최근 몇 년 사이 북한 농촌 사진의 문법이 달라진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그러나 그 변화가 농촌 현실의 실질적 진전을 의미하는지는 또 다른 문제입니다. 사진은 언제나 현실의 일부를 보여주지만, 동시에 보여주고 싶은 현실을 만드는 장치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지금 중요한 질문은 이것입니다. 북한은 정말 농촌 기계화를 본격적으로 진전시키고 있는가, 아니면 기계화의 이미지를 앞세워 정책 성과를 먼저 보여주려는 것인가. 노동신문 사진만으로는 아직 그 답을 다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적어도 사진의 표정과 거리감은 예전과 달라졌습니다.
● 김정은 사진의 영향
한 가지 더 주목할 점은, 김정은 시대 들어 최고지도자의 사진 표현 방식 자체도 달라졌다는 사실입니다. 김정은은 이전 세대보다 감정을 더 드러내고, 인민과의 접촉 장면을 더 많이 노출하며, 얼굴을 가까이 보여주는 방식으로 연출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변화가 아래로도 영향을 미쳐 농민과 노동자의 얼굴 표현 방식까지 조금씩 바꾸고 있는지 지켜볼 필요가 있습니다.
앞으로 확인해 볼 포인트는 분명합니다. 노동현장 밖의 일상 속 인민 얼굴이 더 자주 클로즈업되는지, 사진 속 인물에게 이름이 붙기 시작하는지, 환한 웃음만이 아니라 피곤하거나 진지한 표정도 허용되는지입니다. 이런 변화가 이어진다면, 그것은 단순한 사진 구도 변화가 아니라 북한 시각 정치의 변화를 뜻할 수 있습니다.
● 수원에서 본 또 다른 얼굴들
오늘(5월 23일) 오후, 수원에서는 또 다른 북한 사람들의 얼굴이 한국 카메라 앞에 서 있습니다. 북한 내고향여자축구단이 AFC 여자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을 치르는 날입니다. 지난 5월 17일 39명의 선수와 코치들이 인천공항으로 입국할 때 저도 현장에 있었습니다. 선수들은 짙은 감색 정장에 김일성·김정일 쌍상 휘장을 단 채, 실향민들의 환영 인사와 취재진의 “손을 흔들어달라”는 부탁에도 응하지 않고 무표정으로 입국장을 빠져나갔습니다. 한국과는 이제 완전히 다른 나라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일부 선수들은 세관 통과 후 버스에 오르면서까지 여권을 손에 들고 있었습니다.
같은 5월, 같은 북한 사람들인데 노동신문 지면의 농민은 환하게 웃고, 인천공항의 선수단은 무표정합니다. 이 차이가 우연일까요. 노동신문의 카메라 앞에서는 ‘보여주고 싶은 얼굴’이 만들어지고, 한국 취재진의 카메라 앞에서는 ‘보여주지 않을 얼굴’이 선택됩니다. 같은 사람이라도 어느 무대에 서느냐에 따라 얼굴의 정치가 달라집니다.
내일(5월 24일) 선수단은 다시 인천공항을 통해 출국할 예정입니다. 그때 그들의 얼굴이 어떻게 찍힐지, 그리고 그 사진이 다음 주 노동신문에 어떻게 실릴지 혹은 실리지 않을지도 함께 지켜볼 만한 대목입니다.
개인적으로 북한 사람들의 표정이 좀 더 담겼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신가요. 좋은 댓글로 여러분의 시선을 나눠주시면 좋겠습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