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사 진상 규명과 추모 두고 갈라지는 사회 비극을 정치 제물 삼는 파렴치한 정치꾼 탓 유족에 최소한의 위로, 시민 안도감 빼앗아 비극을 비극으로 대할 때 인간 존엄 지켜져
박상준 칼럼 객원논설위원·와세다대 국제학술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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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7월 17일, 우크라이나 동부 상공에서 말레이시아 항공기가 격추돼 탑승자 전원이 사망하는 참사가 발생했다. 네덜란드에서 출발한 비행기였기 때문에 탑승객 중 대다수가 네덜란드 사람이었다. 그 외에도 말레이시아, 호주, 벨기에 등 여러 나라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사건 직후, 당시 우크라이나 동부를 실질적으로 지배하던 친러시아 반군의 한 지도자가 우크라이나군 수송기를 격추했다며 자축하는 글을 소셜미디어에 올렸다. 이 글을 비롯해 통신 감청 등 여러 정황 증거가 쏟아지면서 러시아와 친러 반군이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됐지만, 러시아 정부는 관련 혐의를 전면 부인했다.
이후 구성된 국제공동조사단이 러시아 국적자 세 명과 우크라이나 국적자 한 명을 용의자로 특정했다. 2022년 네덜란드 법원은 이들 중 세 명에게 종신형을 선고했으나, 용의자들이 러시아에 도피 중이어서 실제 체포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그 대신 피해국들은 러시아를 상대로 배상을 요구했고, 지금도 국제사법재판소에서 재판이 진행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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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지만, 외국의 무력에 의해 자국민이 피해를 입는다면 한국 정부는 어떤 입장을 취하게 될까? 네덜란드처럼 끝까지 진상을 규명하고 범죄자를 단죄하려 노력하든, 말레이시아처럼 어느 수준에서 덮고 넘어가려 하든, 사건 이후 일이 어떻게 진행되든 희생자들은 가족의 품으로 다시 돌아올 수 없고 유가족의 슬픔도 사라지지 않는다. 그 슬픔과 고통을 감히 헤아리기도 어렵다.
다만, 국가가 사건 수습과 진상 규명을 위해 들이는 정성, 희생자의 존엄을 지키려는 태도, 그리고 유족의 슬픔과 고통을 이해하고 도우려는 노력이 유족에게는 최소한의 위로가 될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 서로 보살피는 사회에 살고 있다는 안도감,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하자는 결의에서 오는 안정감도 못지않게 중요하다.
그러나 말레이시아에서 정치적 입장에 따라 여론이 갈렸던 것처럼,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심하게 한국에서는 인명이 희생된 비극이 곧잘 진영 논리의 제물이 되곤 한다. 어떤 경우에는 진상 조사조차 정치적 선입견으로 결론을 미리 정해 놓고 시작하는 사람들까지 있다.
2002년 ‘효순이 미선이 사건’, 2008년 ‘금강산 관광객(박왕자 씨) 피격 사건’, 2020년 ‘서해 공무원(이대준 씨) 피살 사건’을 대하는 태도에서 극명한 차이를 보이기도 한다. 제2연평해전(2002년), 천안함 폭침(2010년), 세월호 참사(2014년) 그리고 이태원 참사(2022년)와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2024년)에 대해서도 정치 성향에 따라 말이 달라진다. 그리고 그 모든 혼란의 이면에는 비극을 정치 선동의 도구로 이용하는 정치꾼들의 파렴치함이 도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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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명이 희생됐을 때, 내 진영에 유리하다면 의혹을 부풀리고, 불리하다면 당연한 의문도 덮어버리는 사회에서 우리는 안도감과 안정감을 가질 수 있는가? 인명의 존엄은 지킬 수 있는가? 이제는 정치의 개입이 없는 진상 규명을 통해 희생자의 존엄을 지키고 유가족을 위로하며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방책을 세우는 일을 우선해야 한다. 내년 5월에는 비극이 정치 선동의 도구인 시대가 끝나 있으면 좋겠다. 비극은 정치 선전의 도구가 아니다.
박상준 칼럼 객원논설위원·와세다대 국제학술원 교수